밤하늘에 붉은 등이 걸렸다. 가로등, 거리의 각종 간판 불빛 사이에서 그보다 조금 높게 떠오른 오렌지색 원구 하나. 동그란 LED등이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보름달이다. 붉은 달. 월식인가? 뉴스에서 들은 기억이 없다. 가만히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니 월식은 아니다. 달이 붉은 거다. 다음 날도 붉은 달이다.

도시의 현란한 빛들 속에서 달은 존재감이 없다. 캄캄한 저녁, 산 능선이나 바닷가에서 보는 달은 얼마나 독보적인가. 어느 해였던가, 정월 대보름 경주 감포 해변의 달은 장엄하기까지했다. 하늘 위에 뜬 달과 일렁이는 물결 위로 흔들리며 비추는 또 하나의 달. 물거울에 비친 보름달 위로 천 개의 은빛 조각이 부서진다. 대왕암을 품은 짙푸른 감포 바다는 대보름달의 인력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자갈밭을 하얀 포말로 채운다. 밀려올라온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은 무속인들은 각자 정성껏 준비해온 제물을 펼쳐놓고 달에게 소원을 빌고 해원을 하느라 징소리는 밤새 내내 울렸다. 낮게 울리는 징소리에 나도 살짝 기대어 치성을 드리고 싶었던 어느 대보름날의 기억이 소환된다. 그날 자정 뉴스에서 본 한반도는 점점이 타오르는 달집이 해안선을 한 줄로 이었고 대나무로 첩첩이 지은 달집엔 사람들의 애틋한 소망이 하얀 소원지로 바람에 날렸다. 그날 밤의 달은 높았으나 가까웠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 즌 대를 드대올세라 / 어긔야 어강됴리’.

달을 노래한 가장 오래된 기록,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의 구절이 떠오른다. 악보와 함께 움직임도 기록이 되어 있다는데 백제인들은 어떻게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을까. 초겨울 늦은 밤길, 우연히 고개를 들다가 깜짝, 마주치는 하얀 달에 나도 누군가의 안부를 부탁하고는 했다.

붉은 달, 블러드 문.

고대 그리스에서는 붉은 달이 뜨면 하계를 다스리고 주술을 관장하는 헤카테 여신이 저승의 개를 데리고 지상을 누비며 핏빛 저주를 퍼트린다는 전설이 있었고, 서구권에서는 농사철의 붉은 달을 흉년의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징조. 연이틀 붉은 달이라니…. 그러고 보니 요즘 며칠 내내 전국적으로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마치 안개라도 낀 듯 부옇게 희미하게 윤곽을 무너뜨리는 미세먼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이 도시에도 낯설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붉은 달은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재난의 수준이 되어버린 미세먼지. 대도시뿐만 아니라 소도시, 도시 인근의 숲까지 미세하게 침투한다. 우리의 일상도 서서히 변화한다. 날마다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하고 그에 따라 그날의 들고남을 계획한다.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또 어느새 익숙해지면서 미세먼지에 대항하는 생활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양한 마스크뿐만 아니라 휴대할 수 있는 개인용 공기청정기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저런 미세먼지 저감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삶의 양식이 변화되지 않으면 해결 불능일 것이다. 우리는 편리함과 과소비의 습관이 뼛속 깊이 들어와 있어서 사람이라는 모습으로 일 분 일 초를 움직이는 동안 끊임없이 쓰레기를 생산하고 에너지를 소비한다. 더 편리하게, 더 보기 좋게, 더 구별되게 우리를 소비의 놀이터로 끌어들이는 이 거대한 흐름이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미세먼지와 함께 하는 것이 일상이 될 것이다.

먼지에는 추억이란 게 있다. 시간의 경과와 그만큼의 사연이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먼지는 제 스스로 뭉쳐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구석진 곳으로 몰려갈 줄도 안다. 문득 발견하게 되는 한 움큼의 먼지뭉치에는 겨울옷에서 떨어진 보푸라기, 아이의 가는 머리카락, 아 그리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작은 반지, 새끼손가락에 끼던 얇은 반지가 있다. 고마운 먼지.

그런데, 정말 큰일이다. 미세먼지 지수가 높은 날이 빈번해지면 다른 것도 문제지만 정말 달도 문제다. 식물은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달의 기운이 더해져야만 한다. 미세먼지가 자꾸만 달을 가리면 식물들은 언제 자랄 것이며 사람들은 무얼 보고 빌어야 되나. 아무래도 큰일이다.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