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는 밥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현실은 타협이고 이상은 미래지향적으로 여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98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20대 청춘이 누릴 수 있었던 객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 소위 어용 교육에 물든 사고를 교정한다며 엄청 비판했던 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였다. 중국 고전 사서삼경인 대학(大學)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고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뜻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였다. 그때는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의 체제 유지 논리로 여겼다. “문제의 원인은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있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자기 몸가짐부터 바르게 하라”며 세뇌시킨다고 봤다. 그렇지 않은가. 혼자 수신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수신을 잘한 사람이 치국하고 평천하한다면 2000~3000년 전 부처님과 예수님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호기롭게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신자유주의의 매운맛을 겪으며 현실과의 접점을 찾다 보니 밥보다 소중한 게 없었다. 서른 중반 즈음에 겪어야 했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시련은 옆과 뒤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았다. “이념이 밥 먹여주나, 앞만 보고 달리자.” 마침 그즈음 세상에는 ‘내 탓이오’ 운동이 벌어졌다. 그래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개뿔!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할 힘이 없는 내가 잘못이지.

그때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수신 문제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했다. 수신을 못 하고도 치국을 하는 사람은 있었다. 1998년 터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성 추문 사건인 ‘지퍼게이트’를 보면서 “수신 그거 사람 따라 다르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에게는 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있었지만.

그는 경제호황에 힘입어 미국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한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수신 측면에서는 빵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게 ‘지퍼게이트’다. 빌은 이 사건으로 탄핵위기에 처했다. 백악관 법률부서 인턴인 모니카 르윈스키와 2년간 성관계를 가져온 게 발각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악관 집무실에서.

그런데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그를 구해낸 건 힐러리였다. 힐러리는 “한결같이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며 감쌌다. 이런 힐러리의 모습에 여론은 움직였다. 수신은 못 했지만, 제가는 제대로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힐러리는 대인배 대우를 받았다. 힐러리에 대한 지지율은 70%를 넘게 치솟았다. 이에 힘입어 빌은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돼 임기를 마쳤다. 힐러리도 ‘지퍼게이트’ 후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 2016년 대선 최다 득표자 등등. 우습게도 정치인 힐러리를 키운 건 팔 할이 ‘지퍼게이트’였던 것이다.

이처럼 수신 논란을 딛고 치국하려면 필요한 게 있었다. 빌처럼 현명한 부인이라도 있어야 했다. 진정성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본인이든, 가족이든. 요즘 수신제가 문제로 좀 많이 위기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보면서 떠올려본 나의 생각이다. 이 지사는 친형 정신병원 강제 입원 지시 의혹, 욕설이 담긴 음성파일 등 가정사, ‘검사 사칭’ 혐의, 지역 개발 업적 과장 선거 공보 게재, 여배우 김부선 씨와의 스캔들 등으로 검찰과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다 부인 김혜경 씨도 그를 구할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트위터 ‘혜경궁 김씨’ 문제로 그를 궁지로 내몰고 있다. 경찰이 계정주가 김 씨라고 지목한 것이다. 이 트위터는 극언과 극단적인 비유가 많고 공격 대상도 문재인 대통령 등 여권 내부여서 논란이다. 총구를 내부로 돌렸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네 가족이 꼭 제2의 세월호 타서 유족 되길 학수고대할게~’ 등의 세월호 관련 대목은 치명적이다.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 못 하면 대권은 고사하고 정치생명이 끝날 판이다.

그런데도 이 지사의 대응은 의혹을 더 키운다. 사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먼저 수사를 요구하고 부인의 휴대전화를 공개하면 이처럼 궁지에 몰릴 문제들은 아니었다. “경찰은 진실보다 권력을 선택했다” 등의 대응 방식은 정쟁과 음모로 몰아가려는 의도로 비친다. 권력 핵심으로부터 탄압받고 견제받는 잠룡의 모습과 ‘친문 대 비문’의 대결 구도를 그려내려는 듯하다. 이래서 점점 더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소년공 시절 프레스에 다친 팔, 검정고시로 딴 중고교 졸업장, 사법고시 패스 등 이 지사의 인간 승리 수신 스토리가 논란 속에 갈수록 더 깊이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