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똘히 생각하거나 기도할 때 손을 깍지 낀다. 평안과 느슨함과는 거리가 있는, 마음을 한데 모으는 절실한 행위일 것이다. 특히 치아 치료를 받을 때 맞잡는 손은 긴장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청각과 촉각과 의식이 드릴 소리에 초긴장한 상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밑에 종종 깍지를 끼고 한동안 몸을 사려야 했다.

나의 간절함을 다른 누군가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위안감은 크다. 나만 아프고, 나만 슬프고, 나만 힘들다고 절망할 때, 타인도 그 비슷한 처지임을 아는 순간 동질감이 생긴다.

어느 날 치료를 잠시 쉴 때, 옆 진료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누워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을 깍지 끼고 있는 거다. 동지를 만난 듯 그들의 긴장감을 엿보곤 동병상련의 애틋함으로 긴장이 누그러졌다.

그런 치료를 마무리했으니 이도 결실이라면 결실이라며 한 해를 결산한다. 회한과 몽환에 젖기보다 기해년에 기대를 걸고 싶다. 흩어져 사는 가족이 떠오르고, 격절한 이의 안부도 설핏 묻고 싶어지는 때, 그러나 몇 남은 징검다리를 무사히 건너야지 하는 바람이 가장 클 때다.

이 시기가 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어느 주일 미사 후, 신부님은 탁자 위에 하얀 봉투를 쌓아놓고 하나씩 가져가라고 했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열어본 봉투에는 놀랍게도 돈 오천 원이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을 줍시다’라는 메모와 함께.

웅성거림을 잠시 지켜보던 신부님은 그 돈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정말 불쌍한 이웃에게 주라고, 눈에 띄는 대로 금방 내어주지 말고 어느 정도 고민을 한 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고 당부하셨다.

오천 원이 든 봉투는 핸드백에서 나와 동행하게 됐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생겼다. 오천 원을 줄 대상을 찾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는 거다. 세상을 보는 눈을 나로부터 바깥으로 이동하게 한 봉투였다. 대상을 찾아 고민하던 돈은 성탄 카드를 가두판매하는 시각장애인에게 건넸다. 그제서야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해졌던 기억이 되새김되는 때다. 오천 원을 줄 대상을 찾던 마음을 잃고 사는 나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이즈음 무탈한 것보다 복된 게 있을까. 뉴스마다 살얼음 위를 걷듯 위태한 세상을 내보인다. 두루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올해 마지막 날도 나름 경건하게 보낼 작정이다. 1년간 모아둔 영수증을 차분히 정리하거나 수첩 자료를 이월하고, 혹시 챙기지 못한 일은 없는지를 살필 것이다. 물론 가까운 몇 사람에게는 안부 전하며 연결고리도 이월할 터다.

가을볕처럼 잠깐 사이에 사라진 한 해 끝자락에서 자잘한 소회에 젖는다. 본의 아니게 상대를 언짢게도 했다. 이 일은 내내 죄송함으로 남을 일이다. 이는 마무리까지 맥 놓지 말라고 때린 죽비가 아니었나 싶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부른 화였다. 살아가는 데 당당하게 장담할 일이 얼마나 될까. 섣부른 장담을 하지 못하는 현상은 세월에 떠밀릴수록 신중해지는 것 같다. 혹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허튼사람으로 치부될까 하는 염려가 앞선다.

실은 감사할 일이 더 많다. 잠자리 들기 전에 감사하다는 화살기도를 하게 된다. 무엇보다 주어진 이 지면이 감사하고, 마지막 날 할애된 지면에도 감사한다.

한 해라는 백지가 펼쳐졌을 때는 어떤 밑그림을 그려 아름답게 채울까 고심도 했을 것이다. 차츰 그 결심이 흐릿해지다가 어영부영 기회조차 흘려보내고 나서야 사라진 것의 가치에 사무친다. 그것은 꼭 시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터다. 사람에, 물질에, 관계에…, 모두 두루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잎새’처럼 딸랑 남은 며칠. 내년 봄은 분명 여느 해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품는 때다. 거역할 수 없는 절벽 너머 꿈을 찾아 내딛는 십이월, 그 끝날.

‘늙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밤이 한없이 아깝다’라는 노천명의 수필 한 구절을 읊조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갈 건 가고 올 것은 오겠지만.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