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흘러 다시 그날이 다가온다.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작하도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 울려퍼진 ‘기미독립선언’에는 근대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초봄의 연둣빛 새싹을 보는 듯하다. 제국주의(위력의 시대)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도의의 시대)를 실현하고자 하는 염원이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함.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그 염원은 그해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임시헌장’에서 제도적으로 구체화된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출범한 ‘민주공화국’이었다.
같은 해 11월 9일 결성된 항일단체 ‘의열단’에 이르러선 혁명을 꿈꾼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파괴할 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에서 혁명 대상으로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 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노예적 문화사상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선열들의 염원대로 일제를 털어내고 민주·평등 세상을 이뤘을까. 이는 3·1운동, 임정, 의열단 10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에게 던져진 성찰 과제다. 성찰은 이미 시작됐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것이다.
수사 결과는 참담하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립이나 법관 해외 파견 따위의 사익을 위해 법원과 법관의 독립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사법 농단 사건들 가운데 일제 강제징용소송 개입은 특히 절망적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을 뒤집기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데서 한 발 나아가 일제 전범기업의 소송대리인과도 재판을 협의했다니 아연할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게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파행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에서 기인한다.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삶에서 그 실상이 잘 드러난다. 양 전 원장이 배석판사 시절 몸담았던 재판부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독재수단인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는 재판장이 되어선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이들에게 줄줄이 유죄를 선고했다. 그 중 6건이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졌다. 그는 대법원장 취임사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가 사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정작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거나 KTX 승무원의 코레일 정규직 임용을 인정하지 않는 등 되레 약자를 탄압했다. 그의 법관 인생에는 일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메이지 유신을 본받은 군사독재정권에 충성하며 승승장구하더니, 일제 전범기업을 돕는 극단적인 행태까지 보였다.
100년 전 반제평화, 민주공화를 위해 신명을 바쳤던 선열들이 이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을까. 1920년 9월 14일,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도 그 한 명일 터이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 박 의사는 의거 전 하시모토의 면전에서 처단 사유를 당당히 밝혔다. 일경에 붙잡혀 대구감옥에 갇혀서는 “왜놈의 손에 목이 졸리긴 싫다”며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제 법정의 존재 자체를 부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박 의사와 ‘양승태 사법부’를 대비하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양승태 사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입법부에서도 ‘양승태 사법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정황이 확인됐다. ‘양승태 사법부’가 국회에 상고법원 설립 입법 로비를 할 당시 일부 국회의원이 판결 선처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선열들이 추구했던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인 삼권분립이 뿌리째 흔들리는 형국이다.
성찰은 더 치열해야 한다. ‘의열단선언’에 제시된 혁명 대상들을 우리 현실에 견주어봐도 그 필요성이 드러난다. 의열단선언의 ‘특권계급’에선 부귀를 대물림하는 기득권층이 어른거리고, ‘경제 약탈제도’는 취약한 경제민주주의로 이어진다. ‘사회적 불평균’은 갈수록 확대되는 빈부 양극화와 겹쳐지니, 지난 100년간 우리 사회는 과연 발전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도 이런 문제의식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무엇을 했나? 당당히, 바르게 잘 살아왔을까? 걷어내지 못한 근대의 그늘 속에서 자성이 꼬리를 문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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