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에 입학하던 해,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을 번호순으로 앉혀 자리를 배치했다. 그 이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분단만 바뀔 뿐, 그 배치 그대로 1년을 보냈다. 그 덕분에 나를 시작으로 뒤로 쭉 앉은 아이 일곱 명은 ‘좌충우돌 엽기발랄’한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며 친해졌다. 도시락을 싸오던 시절이라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으니 우리의 엄마는 일곱 명을 같이 먹여 키운 거나 다름없다. 매점을 함께 다니고 휴일에는 서면이나 남포동을 쏘다니던 평범한 여고생 일곱 명은 ‘꾸리’라는 모임 이름까지 짓고 우리만의 이름표를 만들기도 했다. 반이 바뀌고 문·이과로 나뉜 후에도 우리는 조촐한 생일을 챙겨주며 함께 지냈다.

1997년 닥친 IMF 외환위기는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어느 날부터 보충수업비 등을 내지 못해 교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이 속출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수학여행 포기사유서를 제출한 아이, 친한 친구가 가지 않아서 덩달아 포기사유서를 제출한 아이들은 수학여행 기간에 교실에 앉아 있었다. 체육선생이 교실에 들어와 칠판에 ‘자습’이라는 글자를 쓰고 교단에 앉아 말했다. “이 시간쯤이면 설악산에 도착했겠네.”

우리는 야속한 마음에 야유를 퍼부었고 선생은 놀리듯 말했다. “너희가 안 간다고 해서 그렇게 된 건데 왜 내게 화를 내냐”고. 그날, 내 몸을 채우던 ‘어른에 대한 순수한 분노’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꾸리’는 졸업을 했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연락하고 만나고 곗돈을 모았다. 그리고 지난 1월, 20년 만에 수학여행을 떠났다. 남편, 아이들 없이 오직 ‘꾸리’만 모여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일정을 맞추고 그 기간의 아이와 일 문제를 정리하느라 각자 고군분투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친구들에게 새삼 놀랐는데, 코스를 짜고 비행기 표, 숙소 등을 비교해 예약하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환전을 담당하거나 미세먼지 마스크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친구도 있었다. 다행히도 ‘7인자’를 담당하는 내게 친구들은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오는 것만 하면 된다고 해줬다. 고마운 그녀들을 위해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마스크 팩을 한 통 사갔다.

홍콩은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였다. 유년의 오랜 영웅 ‘주윤발 따거’를 애써 떠올리며 골목골목을 누볐다. 내후년이면 불혹인 우리는 이제 막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10대 같았다. 귀엽고 반짝이고 맛있는 것에 열광하고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으며 헤어에센스, 화장품 등을 공유하고 고데기로 서로의 머리를 말아줬다. 일곱 명 모두 색상만 다른 팔찌를 사서 차기도 했다. 개인사정 때문에 오지 못한 한 명의 친구를 위해 함께 선물을 사고 편지를 썼다. 분명 혼자였으면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유쾌하게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십대의 시간을 참으로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홍콩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었다. 센트럴광장 곳곳에 종이박스를 깔고 앉은 동남아계 여성들이었다. 노숙자인줄 알았는데 한 친구가 홍콩에서 가정부 일을 하는 필리핀 여성이라고 했다. 주중에는 가정부 일을 하지만 주말에는 고용인 가족들이 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에 센트럴광장에 나와 있는 것이라 했다. 그들은 싸온 음식을 나눠먹고 카드놀이를 했다. 한쪽에서는 꽹과리 같은 악기를 들고 전통춤을 연습하는 무리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소풍처럼 보이는 장면들.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도시의 광장에 그런 광경이 펼쳐지다니 머릿속에 그녀들의 ‘소풍 아닌 소풍’과 우리들의 ‘수학여행 아닌 수학여행’이 겹쳐보였다. 자습하던 교실에서 설악산을 생각하던 우리는 이십 년 후 홍콩에서 10대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국에 두고 온 일들을 염려했다. 광장에 모인 그 여성들은 어디의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까. 어디의 무엇을 생각하며 홍콩에 왔을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꾸리는 내년 방콕 여행은 어려움을 또 겪어야겠지만 ‘우리’여서 가능한 그 재미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이제 어쩔 수 없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