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여권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여행 첫날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밤늦게 입국을 하고 자정에 페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는 참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휴대전화를 붙잡고 카톡을 하다가 공항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모양이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별일을 다 겪어봤지만 여권을 잃어버린 적은 처음이었다. 여권이 없으면 여행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재발급을 해야 한다.

아내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이 공항은 익숙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해서 갈 테니 먼저 비행기를 타라고 했다. 이번 여행에는 우리 외에도 네 명의 지인이 함께했고 나는 가이드 격이었다. 나도 남아 함께 찾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머지 네 명도 함께 남아야 하는 상황이라 아내를 놔두고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여권을 잃어버린 지 1시간 만에 찾았다는 연락이 아내로부터 왔다. 공항 안내소에 가서 문의를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자신이 다녔던 길을 따라서 혹시나 땅에 떨어졌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여성 배낭 여행자 두 명과 마주쳤다. 그들의 손에는 아내의 여권이 들려있었다. 사연인즉슨, 그들이 여권을 공항 게이트 근처에서 주웠는데 그 속의 사진과 닮은 사람을 찾기 위해 공항을 빙글빙글 돌다가 아내과 맞닥뜨린 것이다. 여권을 잃어버린 것도 거짓말 같지만 찾게 된 건 더욱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다음 날 아침 첫 비행기로 아내는 페낭에 도착했다. 여행 첫날부터 액땜을 제대로 했는지 다음 일정부터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술술 풀렸다. 태국의 수린섬과 푸켓, 인도네시아의 웨섬 등에서 3주 정도를 보냈다.

가이드를 한 덕분에 사람들을 다 보내고 혼자 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엔 외딴섬이 아니라 도시를 탐험해보고 싶었다.

먼저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냈다. 사흘쯤 지나서였나. 부산으로 치자면 서면 한복판인 부킷 빈탕 지역에서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길을 잃었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사연인즉슨 싱가포르에서 이곳으로 여행을 온 프로그래머인데 가방에 넣어둔 지갑을 통째로 도둑 맞아서 싱가포르로 돌아갈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빌리려고 한 금액은 약간 부담이 될 정도지만, 그의 사정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내도 낯선 사람의 친절로 여권을 찾지 않았나.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내 머릿속에서 이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겪었던 일이 아닌가.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다는 그 흔한 에피소드.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나 도와줄 길이 있나 싶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결론은 내일 아침, 대사관이 문을 열면 그곳에 도움을 구하거나 친구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 혹은 이곳에 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럼 차라리 나와 함께 싱가포르로 가는 건 어떻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나는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여행자니까 싱가포르에도 그와 함께 갈 수 있다. 돈은 돌아가서 갚으면 된다. 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사소한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그날 밤은 24시간 문을 여는 맥도날드에서 보내겠다고 했다. 그래서 음식이라도 사주겠다고 했는데 또 거절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들 사기꾼이 틀림없다고 했다. 나도 돈을 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자는 어떻게 싱가포르로 돌아갔을까.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에게 파렴치한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불편해지는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지기 점점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괜히 도움을 주려다 시비에 걸려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그 친절을 자기 이익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도 선뜻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게 낯선 타국에서, 당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가·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