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가난하여 고교를 중퇴한 ‘철수’는 대기업 청소부로 취직했다. 일을 하며 어렵사리 야간공고를 졸업하자 회사는 그에게 계열사의 전기보수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계열회사지만 대기업 사원으로 인정돼 중소기업의 노동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고, 기업 내 다른 직위의 임금이 상승하면 그의 임금도 따라 올랐다. 보험료와 퇴직금이 지급됐으며 무엇보다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 퇴사하지 않고도 대학을 다니며 전기전자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전기전자기술 부문 직원교육을 담당하는 본사의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대 초 기업 내 연구개발부 신설을 주도했고 2000년대 중반에 전기전자기술 담당 최고 책임자가 됐다. 은퇴 후 지금도 관련 중소기업에서 고문으로 활동한다.

2010년대 ‘영수’는 전문대 졸업 후 ‘철수’가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전기전자기기 보수와 유지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같은 작업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대기업 정규직 직원과 비교해 70%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정직원의 임금이 상승해도 그의 임금은 그대로다. 부가급부로 4대 보험과 퇴직금 정도의 혜택은 있다. 승진, 대기업의 업무구조에 편입되기 등을 꿈꾸지만 일단은 1년 단위의 재계약의 불안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하청업체의 계약직이다.

지난 40~50년 한국의 노동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97년 시작된 한국의 외환위기가 언급될 수 있다. 당시 IMF의 정책 권고도 있었지만 기업들 스스로도 매출 총량보다 수익률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경영전략을 수정했다. 부채를 껴안고 외형적 규모를 확대하던 그간 전략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기업은 직접 고용의 경우 핵심역량사업에 필요한 인원만으로 한정하고, 기타 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영역의 고용은 아웃소싱하며 회사의 몸피를 줄여나갔다. 최근에는 전통적으로 모기업의 핵심영역이라 할 부문 가령 호텔에서 시설관리부문, 식당의 요리부문, 유통산업의 하역부문, 심지어 로펌에서 기초법률서비스 제공업무까지 외주화가 확산하고 있다.

따라서 ‘영수’가 사는 이 시대에는 ‘철수’ 시대의, 기업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고 관리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단순했던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대신 계약직, 임시직, 파견직, 혹은 개인사업자 자격을 가진 ‘사실상의 노동자’ 등 복잡하게 세분화된 형태의 간접고용이 일상화됐다. 사업장의 고용형태가 이렇게 수많은 형태로 분열된 노동시장의 변화를 미국 경제학자 와일은 “우리의 직장이 균열(fissured)됐다”고 표현한다. 이제는 기업과 노동자 간 임금결정 문제가 기업과 다른 기업 간 업무가격 결정문제로 바뀐 것이다.

기업은 자신이 직접 고용했던 노동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하청기업의 노동자로 내몬다. 그들로서는 노무관리와 사회보장의 부담을 회피하면서도 해고가 자유롭고 산재의 위험까지 하도급체에 전가할 수 있는 외주화의 많은 이점을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하도급에서 재하도급으로 하청의 단계가 늘어나 균열 일터의 말단에 이르면 이윤마진은 극도로 슬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종기업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비숙련, 저임금 ‘알바생’을 고용하고 안전교육 등 노무관리비용을 대폭 삭감한다. 사고의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원청기업은 위험조차도 하청업체에게 떠넘긴다.

2016년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20세 김 모군, 2017년 현장실습을 나가 압착기에 끼어 사고사한 특성화고교 18세 이민호 군,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죽음을 맞은 24세 김용균 씨, 모두 그런 ‘위험의 외주화’로 죽음을 맞은 이 시대 ‘영수’이다.

IMF는 2018년 한국이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선 선진국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이 땅의 수많은 ‘영수’는 고용불안, 저임금과 함께 더 위험한 직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시장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노동시장의 균열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 시대의 ‘영수’들은 안전한 고용상태에서 3만 달러 시대에 부합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개선을 포함한 세심한 정부정책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