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은 사과 산지로 유명한 경북 청송인데, 제가 어릴 때는 사과보다 고추 재배를 많이 했습니다.

고추 풍년이 드는 해는 버스를 타고 차창을 내다보면 도로 양옆으로 이어진 밭마다 탐스럽게 익은 붉은 고추가 장관을 이뤄 보는 사람 마음까지도 흐뭇하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익은 고추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야 해서 고추를 수확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추수철인 가을엔 늘 일손이 부족해서 부지깽이의 도움까지 받아야 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 아이들은 당연히 집안에 없어서 안 될 큰 일꾼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집안 일손을 도와야 했는데 농사일이라는 게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있나요? 또 일을 시작했다 하면 밑도 끝도 없었으니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의 아이들에겐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을 햇살 자글자글한 밭에 고추 이랑은 끝이 없습니다. ‘저 고추 언제 다 따느냐’며 한숨 폭폭 쉴라치면 철부지 달래시면서 젊은 어매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야야, 밭고랑 쳐다보고 지레 걱정하지 마라. 눈은 느려 터져도 손만은 재발라서 조금씩 따다가 보면 하마 다 땄나 할 끼다.”

‘눈은 느려 터져도 손만은 재바르다’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는지요?

일하기도 전에 눈으로 가늠해보고, 머리로 계산한다고 해서 일이 진척되지는 않지요.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은 대체로 눈으로 또는 머리로 미리 계산부터 하려고 드니 일은 당연히 진척되지 않고 느려터질 수밖에요.

하지만 손은 꾀를 부리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일이 닥치면 우선 실행부터 하는 거지요.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거나 재어보지 않고 무조건 시작부터 합니다. 그러니 손은 눈보다, 머리보다 항상 재바를 수밖에요. ‘재바르다’는 ‘움직임이 날래고 빠르다’는 뜻입니다.

감자밭의 감자를 캘 때도, 고추밭의 고추를 딸 때도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일이 많아 보여 언제 끝날까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면 어느새 일은 끝나 있게 되지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란 속담이 있습니다. 부뚜막은 아궁이 위에 솥을 걸어 놓은 옆을 말하는데, 솥 옆에 놓인 소금이라도 그냥 두어서는 음식의 간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거나 이루기 쉬운 일이라도 힘을 들여 이용하거나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입니다. 조상들의 생활 속 지혜가 감탄스럽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시도하면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50 대 50이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100% 실패인데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일이 많거나 힘들 것이라고 미리 포기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당장 실행부터 하라는 거지요.

어느덧 기해년(己亥年)도 석 달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군요. 빠른 세월의 보폭에 맞추느라 지난해도 바쁘게 달려왔고, 올해도 바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 말씀과 더불어 어머니의 재바른 손이 그리워지는 것은 올 한 해도 느려터진 눈을 앞세우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넘길 일이 많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조동화 시인은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뉘라 할 것 없이 시인들일세 /

연푸른 하늘 바닥에 /

섬세의 극치를 다해 꽃이면 꽃, 잎이면 잎 / 그 하나 실수 없이 읊조려내는 /

저 기찬 시구(詩句)들 좀 보시게’.

(조동화 ‘봄 나무들’ 전문)



‘섬세의 극치를 다해 꽃이면 꽃, 잎이면 잎, 그 하나 실수 없이 읊조려내는’ 저 봄 나무들은 바로 평생 농부로 사셨던 어머니의 재바른 손과 같군요.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나무들을 보면서 눈을 앞세우기보다 손을 앞세우는 한 해가 되길 다시 다짐해봅니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