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오후 한 백인우월주의 테러리스트가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에 무자비한 총격을 가했다. 사망자만 무려 50명. 테러범은 사람들을 쏴 죽이는 장면을 페이스북에 생중계했다. 사람들은 그 영상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속하게 그 길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저신다 아던 총리다. 그녀는 사태 발생 즉시 “이것은 테러”라고 명명했다. 이어 테러 영상을 보지 말라고 호소하며, 해당 콘텐츠를 가감 없이 내보낸 페이스북을 강력히 비판했다. 또 즉각적으로 총기 규제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히잡을 쓰고 참사가 일어난 곳으로 가 추모와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19일 열린 의회 연설에서 “테러리스트가 원한 것 중 하나가 악명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테러범의 이름보다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길 호소한다”라고 말했다. 이 참사를 목격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연대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 대처 방식이었다.

한 명의 훌륭한 리더가 사람들을 분노와 증오의 길에서 구해내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 역할을 나누어서 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1, 2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대토론회가 열렸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 ‘노란조끼’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토론회를 제안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신청된 토론 건수만 2886건이고, 이 토론회에는 대통령 장관 시의원 등이 직접 참석하여 국민들의 의견에 직접 응답했다. 한 중학생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유럽에서 나이지리아로 버려지는 2만ｔ의 전자쓰레기에 대해 언제 대응할 건가요? 돈이 당신으로 하여금 환경오염 문제를 무시하게 만드나요?” 토론회 자체가 정부의 보여주기식 술수라는 의견도 많지만, 중요한 것은 대통령 한 사람 혹은 정부의 정책에 끌려가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는 시민들이 있고 그 시민들의 힘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뉴질랜드와 프랑스가 선진사회여서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가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한국 역시 민주주의 사회이고, 민주주의를 실천한 훌륭한 역사가 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 3·1운동이 정확히 그렇지 않은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의 의지, 온몸으로 자유와 평등, 평화의 목소리를 쏟아낸 시민들의 뜨거운 독립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 3·1운동이었다. 외침이 전국으로 끊임없이 퍼져나간 것은 몰락한 왕권에 기대지 않고, 일본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뛰어넘어 모든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꿈꾼 수많은 이의 절실한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역사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는 경향은 계속되는 실망과 분열만 낳는다. 정책을 결정하는 그 어떤 곳에도 무엇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만 가득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만 고조된다. 곧 5주기를 맞는 4·16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4·16 이후 우리는 누구 하나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고, 제대로 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구분 지었고, 그래서 또 다른 세월호를 막아낼 정책도 만들지 못했다. 그런 무능한 정부를 향해 촛불을 들기도 했지만, 그 촛불은 이제 꺼졌으니 시민의 승리라고 하기도 어렵다.

유럽을 중심으로 청소년, 청년 세대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명확한 정책을 내놓으라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 시작은 스웨덴의 한 작은 소녀 그레타 툰베리였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강력한 열망을 지닌 수많은 새로운 세대이다.

우리 역시 가슴속에 그런 불씨가 있다.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우리가 이토록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사회에서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테러범이고, 기후변화이며,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그릇된 가치체계이다. 테러 영상을 궁금해하며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도하고, 생명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는 새로운 세대의 민주주의가 여기 이곳에서도 시작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인디고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