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발업자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NBC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를 통해서였다. 13주에 걸쳐 면접을 본 후 우승자를 트럼프 회사의 견습생으로 뽑는 형식인데 이 프로그램을 제안한 사람이 트럼프 자신이었다. 매회 2000만 명 이상이 시청하면서 그가 외치던 “넌 해고야(You’re fired)”는 단박에 유행어가 됐다. 1999년 군소정당인 개혁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검토하는 등 일찌감치 정치판을 어슬렁거렸던 트럼프가 연예프로를 통해 대선가도를 닦은 것이다.

연예인 출신 정치인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은 로널드 레이건일 것이다. 배우 시절엔 50여 편의 영화를 찍고도 큰 영향력이 없었지만 정치 입문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직까지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주지사 당선 직후 어떤 주지사가 될 거냐는 기자 질문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답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한다.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조셉 에스트라다도 한때 의적 전문 액션배우였다. 대선 역사상 가장 큰 표 차로 대통령이 됐지만 현실 정치 속 그는 그냥 도둑이었다. 뇌물수수 주가조작 혐의가 연쇄적으로 터졌고 민중 봉기로 2001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정계에 진출했거나 정치적 의미가 담긴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을 ‘폴리테이너’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낯선 현상은 아니다. 홍성우 이낙훈 최무룡 이순재 이주일 최불암 강부자 최희준 신영균 정한용 신성일 김을동 등이 금배지를 단 적 있다. 연예인은 정치인의 성공을 좌우하는 호감도와 친근감에서 다른 직업군에 비해 유리한데다 언론 관계에서도 능숙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훌륭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은 별개 문제다. TV나 영화에서만큼 인상적인 의정활동을 펼친 폴리테이너는 드물다.

우크라이나에서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의 탄생을 눈앞에 뒀다는 소식이다. 정치 풍자 코미디 ‘국민의 종’에서 정권의 부패를 파헤치다 대통령이 되는 역사교사를 연기해 유명해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주인공이다. 결선 투표가 남긴 했지만 젤렌스키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모양이다. 작년엔 슬로베니아에서 정치인 성대모사로 사랑받았던 코미디언 마랸 샤레츠가 총리에 선출됐다. 외신은 이들이 떠오른 배경을 공통적으로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꼽는다. 그 기대에 어떻게 부응하느냐가 그들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것이다. 시청자는 웃겼지만 국민은 울리는 폴리테이너도 많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