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온 나라, 온 마을에서 때론 노래로, 영화로. 또 때론 추모의 문장이거나 심장이 저며오는 유공자 가족의 증언으로.

옛날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고 뜻을 기리는 자리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의 희생이 있었으므로 그 지역의 양식을 따른 진혼의 의식도 펼쳐지고, 신문 기사로, 저술로, 학술논문과 정책으로, 노동자와 예술가의 손길로, 소셜미디어로. 우리 국민 저마다 각자의 마음의 결과 표현 방식을 통해 희생된 민족의 넋을 애도하고 민족자존의 정신을 되짚어보는 100년 전 그날. 100년 동안의 우리.

거리에 무시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는 소회가 예년과는 사뭇 다르다. 문득, 생각한다.

앞으로 100년 후 우리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일제 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던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 하나 일상의 어느 한 순간이라도 억압 아닌 것이 없었을 그날들.

국가와 개인의 암울함을 넘어 일제에 의해 전 인류의 공동선을 부정당한 암흑기 였다. 우리 국민의 고통을 취향화하였던 광기어린 괴물국가에 항거해, 아이와 노인, 노동자와 학생, 신분과 종교의 갈래를 초월해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낱낱의 힘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올해만큼 긴 호흡으로 이들을 추모한 적이 있었던가, 새삼 고개를 숙인다.

누군가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이에겐 무참하리만치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 온, 긴 세월 꿈쩍 않던 차디찬 100년의 역사.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은 침묵으로도 전승되는 법이어서, 스스로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묶어두었을 것이다. 나부터 올곧게 흔들리지 말자며 숨죽여 살게 하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의 살아남은 자들은 명멸한 왕조와 제국의 과거는 잊고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시민이 되어 자신만의 화려한 역사를 갱신해 왔으리라. 천인이 함께 분노할 일들을 매 순간 철저히 은폐하면서 역사의 선택지로 무표정하게 새겨놓아온 이들. 또 그런 이들을 문득 성토하다 이내 잠잠해지곤 하는, 실로 비정한 100년의 역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올해 첫 날, 새해 새 희망과 기대를 담뿍 담아 펼친 달력을 펼쳐본다. 그리고 다시 4월, 우리들의 4월을 본다. 지난 100년 전으로부터 100년 후인 오늘의 우리는 100년 전 사람들이 염원했던 이상과 가치를 지켜내고 있는 걸까.

4월 달력에는 어디에서고 굳건히 침묵당해 온, 죽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청년 학생 열사들이 있고, 입술을 닫은 여성이 있고, 불길에 일그러진 노동자가 있고, 홀로 외로운 선택을 한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고, 무참히 죽어간 어르신과 아이가 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4월의 벚나무 꽃잎보다도 힘없이 희생된 죽음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 찬란한 자유로운 나라, 따사롭게 눈뜨는 봄날! 아직도 수요광장으로 나서야 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휠체어를 본다. 강철같은 몸이 근육마저 소실되어 첨탑으로, 굴뚝으로, 벼랑으로, 망루로 가야 하는 야윈 발길들, 해고노동자들의 갈라진 손등을 본다. 정처없는 바람을 붙안고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쳐 부르다, 가슴으로 심장으로 단 한번 꿈에 볼까 아껴 부르다 혼절하는 ‘세월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 가족, 친구, 선생님, 이웃들을 불러본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기도한다. 100년 전의 ‘예언된 우리’가 지금 스스로 규명과 진혼, 사과와 치유를 담보할 ‘4월의 진실들’과 마주할 기회를 부디 놓치지 않기를!

지친 고개를 들어 달력 속 아픈 숫자를 바라보며, 더 깊은 눈물과 비탄을 떨치고 용기를 다짐하던 ‘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기도를 듣던 어느 비 내리는 밤을 떠올린다. 우산도 펴지 않고 오직 온 몸을 깃발처럼 바람 속에 내 걸고, ‘기억하자 잊지말자 함께하자’ 외치던 사람들은, 비단 100년 전에만 있지 않다.

한때 아픈 억압의 그늘이기도 했을 벚나무 그늘 아래서 함께 웃는 봄을 맞은 지금. 이웃의 눈물을 외면해 훗날 또 다른 고통의 징검다리가 되어 100년 후에야 치유의 기회가 소환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말하라, 내가 가고 있다고. 연대의 길 위를 걸어가고 있다고.

시인·낭독서점詩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