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이 시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조국과 민족의 영광 앞에 개인은 없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개인의 영광은 접어둬야 했다. 희생은 당연시됐다. 개인 의지와는 무관했다. 그때 사회 분위기는 그랬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하교 후에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국기 하강식이나 학교 조례 때 남몰래 살짝 짝다리로 서 있는 게 그나마 용기를 내 해보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1980년대 제5공화국 시절 개인적으로 정말 싫었던 말이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5공화국의 국정 목표라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몇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이런 옛 기억에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따져보니 정의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 정의를 강요하니, 그냥 싫어했을 법하다. 나만 그런가. 보통 감성이 이성보다 먼저 아닌가. 여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이 개입할 틈은 별로 없었다. 강요된 충성의 트라우마는 체제 내의 모든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어떤 문제이든 일단 부정하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그늘을 밝혀내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 성공을 말하는 데는 인색한 것은 이때 몸에 밴 인식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런 탓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우리의 경제개발을 비딱하게 보던 때도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 재벌에 특혜를 줘 이룬 그들만의 성장으로 여겼다. 국가 주도로 개발 계획을 짜고 자본을 축적할 수밖에 없었던 후발 자본주의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진국의 자본 유입이나 기술 도입을 종속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학가에 유행했던 말이 자주와 민족해방이었다. 가난도 평등하게 나눠 가지면 행복이라며, 신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끼리의 세상을 동경하는 이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피 끓는 20대 청춘의 황당한 감성이었다. 여기에도 폭압적인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개인 희생에 대한 보상 심리는 통제받지 않은 자유를 정의로 여기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몸뚱어리 하나로 살아가는 이에게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개인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은 국가가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가능했다. 운동장이 기울어졌을 때 바로잡아주는 힘이 없으면 자유 경쟁은 곧 불평등이었다. 권력은, 규제와 통제는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행사하느냐였다. 경제개발도, 자본도 그랬다. 외국 돈이 차관이란 형태로 들어오니 경제개발의 시드머니가 되기도 했다.

너무 나갔나. 잡다한 옛 기억을 늘어놓은 것은 미국에 대한 인식 변화와 국가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어서다. 요즘 중국과 관세 전쟁을 벌이는 미국은 이제껏 알던 자유시장 경제의 상징이 아니었다.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가 나서 규제하고 통제하며 보호무역을 폈다.

미국은 중국산 상품 2000억 달러어치에 대한 관세를 기존 10%에서 25%로 올리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미국은 추가 관세를 부과할 325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 목록을 공개했다. 이 추가 조치에는 스마트폰도 포함된다. 이 때문에 애플이 큰 위협에 직면했다. 애플 단말기 대부분이 중국에서 조립되는 탓이다. 아이폰에 25% 관세가 추가로 붙으면 ‘아이폰XS’ 모델 기준 대당 가격이 160달러(약 19만 원)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애플이 이 관세를 자체적으로 부담할 경우 내년도 주당 순이익은 최대 24%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그런 미국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지난 13일(현지시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월 취임한 뒤 백악관에서 한국 대기업 총수를 면담한 것은 처음이다. 이유가 놀랍다. 롯데케미칼이 루이지애나주에 석유화학공장을 세운 것에 대한 감사의 답례였다. 외국인 투자를 환영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롯데가 수천 개 일자리를 만들었다”며 “양국 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롯데가 미국에 투자한 규모는 31억 달러(3조6000억 원). 앞서 열린 공장 준공식에는 실비아 메이 데이비스 백악관 부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현장을 찾았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부를 이룬 나라란 점을 고려하면 투자 규모에 비해 칙사 수준의 대접이다. 여기에는 다른 외국 자본의 미국 투자를 권장하는 의도가 담겼을 법하다.

사업가 ‘트럼프’다운 접근법이다. 자국 국민의 고용 창출이 우선이었다.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생산하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 생산품에는 관세를 부과해 자국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미국식, 트럼프식 정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경제가, 우리 국민의 이익이 먼저다. 고용 없는 성장 없고, 투자 없는 고용 없다. 당연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