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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비오는 날 친구를 기다리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5-21 19:16:26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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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화계의 중심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 중에는 남다른 우정을 가진 이가 많았다. 유최진(柳最鎭)과 이기복(李基福)의 우정은 남달라 ‘신유(神遊)’라 불릴 정도였으며, 조희룡(趙熙龍)도 이들과 매우 가까이 지냈다. 또한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와 형당 유재소(劉在韶, 1829~1911)도 매우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초당(二艸堂)’이라는 작업장을 함께하기도 하였다.

전기의 작품 ‘상사지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기와 유재소는 네 살 차이의 선후배였으나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성격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취향도 닮아 더욱더 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 모두 매우 단정한 품성을 지녔는데, 글씨와 그림 또한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의 필치는 너무 닮아 한 종이에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면 어느 부분이 각각의 솜씨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전기의 ‘약 창고(藥庫)’에 가서 함께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전기의 ‘상사지회(相思之懷)’는 친구 유재소와의 우정을 담은 빼어난 그림이다. 비 오는 날 친구를 기다리는 모습을 스케치하듯 간략하면서도 단정한 필치로 그렸다. 어느 비 오는 날 전기와 유재소가 만나기로 약속한 모양이다. 그런데 오기로 한 유재소가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약속된 시각에 늦는 모양이다. 어린 친구를 기다리는 전기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진다. 그림 위쪽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화제 글씨 속에는 두 친구 사이의 우정 이상의 정겨운 ‘시정(詩情)’이 담겨 있다.

‘비가 내리는데 구여가 오지 않아, 이 그림을 그려 그리움을 담는다. 구여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1847년 2월 13일’. ‘구여(九如)’는 유재소의 ‘자(字)’이다. 23세의 청년 전기가 19세로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친구 유재소를 기다리는 마음이 곰살맞고 애잔하다. 저 멀리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강 끝 다리에 발을 내디디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이는 바로 전기이다. 이제 기다리다 못해 발은 이미 다리를 건너고 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친구 생각에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며 걱정하는 속 깊은 형의 마음이 따뜻하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끈끈한 정은 어떤 차원일까? 인간적인 우정일까, 예술적 동반일까? 어떤 것이라도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물질문명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서 이런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우정은 보통 부러운 일이 아니다. 부러운 마음에 화제 글씨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자니 더욱더 좋은 친구가 그리워진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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