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방송협회가 중국과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는 기억할 만한 1980년대 인기 프로그램이다. 막 개방한 중국의 내막을 엿본 충격도 컸지만 주제곡의 오카리나 소리가 너무 가슴 시려 ‘길보드’ 테이프를 주야장천 들은 기억도 새롭다. 심지어 방송을 보고 역사학과 진학을 결심했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으니 기억은 다를지라도 저마다 실크로드의 자취는 분명하다.

실크로드는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 남작이 1877년 선보인 말이다. 동서양을 오간 상인들의 물품이 비단 한 종류만은 아니지만, 비단(seres)은 그 나라, 곧 중국의 이름(Seres)이기도 하니 이렇게 정한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실크로드라는 말의 탁월함은 명명된 다음 숱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은유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겠다.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으며 성공의 대가는 얼마나 컸을까?

실크로드 은유의 영향력은 프랑스의 위대한 중국학자 샤반느가 1913년 이를 차용해 만든 ‘해양 실크로드’에서도 드러난다. 샤반느를 질투한 탓인지 모르지만, 해상로의 주요 거래품에 따라 ‘도자기의 길’이나 ‘향료의 길’이라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이들은 하지만 실크로드가 은유라는 것을 모르는, 따라서 상상력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지 싶다.

저서 목록을 보면 정치학자가 아닌가 싶은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 분야를 개척한 언어학자다. 마크 존슨과 공저한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간은 은유 속에 살고 있으며 문학, 사상, 과학 등 전문적인 지적 분야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조차도 은유의 구체적 이미지에 근거해서 영위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인 만큼 꿈꾸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말이겠다. 꿈은 우리에게 도전과 모험을 감행하게 하지만 동시에 있는 것뿐 아니라 있어선 안 되는 것까지 합리화시키는 음험함도 있다.

현재 실크로드 은유가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곳은 국제 정치 분야이다. 시진핑 주석이 ‘일대일로’ 구상을 발표한 2013년 이후 특히 그렇다. 중국은 평화로운 교역과 교통으로 실크로드 은유를 사용했지만 경쟁자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차가운 전쟁과 뜨거운 무역의 시대가 도래하고, 중국 발걸음이 빨라지자 미국은 일대일로 노선상의 여러 나라를 다잡는 행보를 보인다. 버마(미얀마)의 정권 이양이 가장 두드러진 일이다. 군부 독재의 나라를 방문한 오바마가 떠난 뒤 군부는 아웅산 수치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평화적으로! 버마 양곤이 중국의 인도양 전략에서 중요 지점인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작년 가을부터 심각해지는 미중 간 무역 분쟁도 패권 경쟁이 본질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다. 미국의 봉쇄로 지지부진하던 일대일로는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오히려 열매를 맺는 형국이다. 지난 달 중국은 이탈리아와 일대일로 협정을 맺었는데,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준하는 유럽 국가 최초의 사례이다. 앞으로 얼마나 번질지 모르는 무역 질서의 재편을 노리는 도전자에게 챔피언이 가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미국의 카운터블로는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입에서 나왔다. 지난 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북극협의회가 열렸다. 북극권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중·일은 참관국 자격으로 참석하는 회의다. 폼페이오의 발언은 러시아와 중국의 북극해 활동을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환경보호론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북극의 녹고 있는 얼음은 세계 무역의 새로운 기회’라는 문제의 발언이 나왔지만, 뒤이어 나온 말이 내게는 더 흥미로웠다.

일대일로가 잘 풀리지 않던 최근 몇 년, 중국은 ‘극지 실크로드’라고까지 말해가며 꾸준히 북극 항로에 관심을 보여 왔다. 아이슬란드에 투자하고 노르웨이에 과학 연구 센터를 건설할 때만 해도 내버려 두던 미국은 2016년 중국이 그린란드 남서쪽 그로네달의 버려진 덴마크 해군 기지를 매입하려고 나섰을 때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201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미국 언론이며 외교 안보 전략 싱크탱크 쪽에서 극지 실크로드를 비튼 ‘아이스 실크로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난 6일 미 국무장관의 입에서 그 말이 그대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폼페이오는 헬싱키를 떠나 모스크바에 갔지만, 우리에게 보도되지 않은 다음 행선지는 그린란드였다. 폼페이오가 그린란드로 간 까닭은? 오바마의 미얀마행과 같을 것이다.

말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미 해군은 2018년 항공모함을 파견해 북해를 순찰했을 뿐 아니라 대서양을 담당하는 2함대까지 부활시켰다. 미 해안경비대도 7억5000만 달러짜리 신형 쇄빙선 예산을 따냈다. 다들 북극으로 가는 세월이 한동안 계속될 조짐이다. 따라서 실크로드 은유도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도 이 은유를 잘 음미할 때 한 걸음 가까워지지 싶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