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한 유명 종합격투기 선수가 이 종목 애호가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발단은 100만 달러 상금이 걸린 챔피언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다 1라운드 기권패를 당한 데서 비롯됐다. 의외인 것은 이 선수가 평소 많은 추종자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그는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 표출과 상대방에 대한 과격한 독설로 인기를 모았다. 그랬던 그가 팬들의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자 “애초 실력도 없는 선수가 그동안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떠벌리며 다녔는지 모르겠다”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비난이 거세지자 이 선수 소속사의 대표가 해명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단체가 주최한 대회 홍보를 위해 일부러 선수에게 ‘트래시 토크’(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모욕하거나 자극하는 말)를 지시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선수를 희생양으로 만든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으니 그를 욕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의도적으로 살벌한 대결구도를 만들어 판을 키워보려는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 된 셈이다. 하지만 흥행에 목숨을 거는 스포츠 세계에서 이런 일은 다반사니 이들을 대놓고 비난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포츠 쪽은 원래 그러려니 한다지만 정치권에서마저 트래시 토크가 기승을 부리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 면에서 스포츠와 정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종합격투기야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실생활과 관련 있는 정치는 마냥 팽개칠 수도 없으니 유권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영양가 없는’ 말들을 들어야 한다.
사실 요즘 정치권에서 오고가는 설전과 편 가르기를 보면 놀란 입을 다물기가 힘들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한센병 환자” “도둑놈에게 국회를 맡길 수 없다” “거의 사이코 패스 수준” “나이가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 등과 같은 걸러지지 않은 말이 난무한다. 이틀 통해 여야는 거두절미하고 ‘나는 정의, 남들은 불의’라는 식의 틀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덮어씌운다.
여당과 제1 야당 대표의 기 싸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독설 수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반격도 매서워지는 형국이다. 황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최악의 정권” “북한 대변인” 등과 같은 고강도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에 이 대표는 “적반하장격” “제1 야당대표로서 강경 발언이 능사는 아니다”며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여야의 이런 충돌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특히 여당과 제1 야당에게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하다. 한국당이 보수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면 현 정권에 대해 ‘독하디독한’ 공세를 퍼부어야 한다. 이때는 민주당을 ‘독재·친북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극명한 대립구도를 만드는 게 주효하다.
당연히 민주당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비난을 감수할 리는 없다. 민주당은 한국당을 ‘극우·반민주·친일세력의 대변인’이라 부르며 지지세력 단속에 들어갔다. 최근에는 한국당이 재난 대응 및 민생경제를 위한 국회 추경 처리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민생 방기’를 하고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백 번 양보해 여기까지도 선거를 앞둔 여야의 계산된 행동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문제는 독설을 바탕으로 한 편 가르기가 가져다 주는 ‘쾌락과 효능’을 정치인들이 너무 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긴 상대방을 무참히 짓밟고 타도세력으로 몰아붙일수록 지지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고려하면 표심에 민감한 정치권이 이를 놓칠 리 만무하다. 게다가 당장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더라도 발언 당사자의 인기는 오르니 독설은 목숨에 위협이 되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마약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요즘 시대 유권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정치권의 이 같은 뻔한 술수에 넘어가 자신의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겠는가. 정치인의 낡은 행태에 미친 듯 환호해주는 이는 극성 지지자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자신이 유력 정치인이 됐다는 증거라 해석한다면 스스로를 얼치기로 인정하는 셈이다. 게다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지금처럼 강경 대치가 심한 정국을 해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협박과 혐오 조장으로 다른 쪽을 굴복시켜 정국이 안정될 수 있다면 그건 폭력배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일이다.
생업에 바쁜 국민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감히 ‘교양있는 발언을 하라’는 식의 당부를 할 시간이 없다. 솔직히 ‘품격 있는 정치’에 대한 기대 역시 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면 정치권이 최소한 지켜야 할 덕목만은 제발 지켜주는 것일 터다. 국민은 정치권의 얄팍한 수법에 혹할 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논설위원 haorem @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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