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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쉴 권리, 일할 의무 /정순백

정년연장 통한 인력 확보, 저출산 시대 세계적 추세

청년실업 가중 해소 위한 일자리 창출 보완 없으면 장년층 노동질 저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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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나.” 그날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 선배의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찌 보면 자리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그날 자리의 주 화제는 정년 연장이었다. 반응은 좀 많이 뜨거웠다. 함께 했던 이들은 대부분 쉰 중반 즈음.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들이었기에 훅 끌릴 만한 사안이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정년 연장을 논의할 시점”이라는 말은 이미 확정된 정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문재인 정부 임기 내 추진될 것으로 기대하는 이도 있었다.

보통 월급쟁이의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연금도 시원찮은데, 별다른 노후 대책을 해 둔 것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은 낭떠러지에 내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몸뚱어리로 버틸 수밖에 없다. 월급이 반 토막 나고, 일이 좀 험해도 해야지 별수가 있나. 월급쟁이 신분의 연장은 이쯤 되면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의무다.

그런데 이 묘한 기분은 무엇인가. 술만 먹으면 들어 그렇게 짜증스러웠던 선배의 그 푸념이 그날은 유난히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가 처한 상황이 개인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예순 중반의 회사원이다. 늘 은퇴하고 싶어 한다. 중견기업을 정년퇴직한 뒤 조그만 회사에 입사한 지는 5년째다. 일할 만큼 했고 쉴 나이가 됐다. 더욱이 회사 사장은 친구이고, 경영은 아들에게 넘어가는 시점이어서 더욱더 그만 다닐 때가 됐다는 마음이 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회사에 다닌다. 그것도 꾸역꾸역 마지 못해. 퇴직 후 집에서 놀면 늙는다는 말은 그에게는 사치다. 생계형이기 때문이다. 처한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의 아들과 딸 모두 대졸 취업준비생이고, 부인은 평생 전업주부다. 국민연금은 월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정도.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이 돈으로 살아야 한다. 가진 재산은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가 전부. 은퇴할 여건이 아니다. 그러니 더럽고 아니꼽고 힘들어도 돈 벌러 나갈 수밖에 없다.

전후 베이비붐 1세대 맏형쯤 되는 ‘낀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40년 넘게 직장을 다니며 부모를 모셨던 모범적인 가장이다. 자식들 대학만 졸업하면 허리 펴고 살 것이라며 충실하게 살았다. 그런데 퇴직해 쉴 때가 되니, 세상은 변해 버렸다. 대학을 나왔다고 바로 취직이 되는 시절이 아니었다. 자식들이 취업난으로 몇 년째 인턴에 ‘알바’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양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서른 넘은 자식을 아직도 뒷바라지해야 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만하다. 그런 그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한잔 걸치고 했던 하소연을 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 꼰대 소리를 듣는다.
이마에 늘어난 주름살 탓인가. 희한하다. 그의 하소연이 남 일 같지 않다. 그만 겪는 일이 아닌 탓이다. 그래서 더 서글프다. 주변 환경은 갈수록 좋지 않다. 실업률은 4%대에 달할 정도로 일자리가 부족하다. 청년 실업률은 10% 수준으로 심각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년을 늘린다고 한다.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해 일할 사람이 부족하단다. 일자리도,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니 무슨 이런 조화가 있나.

만약 법이나 제도로 정년을 연장하면 그 혜택을 바로 보는 사람은 공무원 공기업 그리고 노조가 확실한 대기업 근로자일 것이다. 모두 좋은 일자리다. 이는 정년 연장이 청년실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기업의 신규 투자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없으면 청년실업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하지만 노조가 확실하지 않은 회사의 종사자는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 등의 형식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가족 생계를 계속 짊어져야 하면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한다. 일할 사람은 필요하지만 노동 환경이 열악해 젊은 층이 꺼리는 일자리는 이들의 몫이 될 것이다. 돌봄 노동과 같은 틈새 일자리가 대표적이다. 우리보다 앞서 정년을 폐지한 영국과 70세로 연장을 추진 중인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너무 많이 나갔나. 저출산 고령 시대를 맞아 정년 연장은 세계적 추세인 것은 맞다. 선진국 가운데 우리보다 정년이 이른 나라는 없다. 프랑스만 62살로 2년 연장했다가 연금 지급이 늦어지는 데 대한 저항으로 원위치로 갔을 뿐이다. 북유럽은 60대 후반이고, 미국과 영국에선 법정 정년이 폐지된 지 오래다. 경험이 커다란 사회적 자산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은퇴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구조는 문제가 있다. 일할 의무만 있고 쉴 권리가 없는 게 우리 사회다. 그래서 노후를 대비한 사회안전망이 중요하다. 청년실업도 해소돼야 한다. 쉴 권리 확보를 위한 전제 조건들이다.

현재 정부는 정년 연장 방안 마련을 위해 ‘범정부 인구정책 태스크포스’를 가동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하는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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