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로 들어온 후, 비상시에 쓰려고 모아 둔 돈으로 집 앞마당에 사랑채(구들장)를 만들어 놓았더니 첫 번째 수혜자는 우리 집 막내딸과 그녀의 중학교 3학년 학급 친구, 8명이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합천의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입주작가로 지내다가, 지난 금요일 해질 무렵 산청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음악과 여자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야식을 챙겨 먹고, 영화를 보다가, 캄캄한 밤에는 집 뒤편 오솔길을 산책하며 별을 보는 등 나름대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날 오랜만에 본채 거실에서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하고 있노라니, 문득 아이들이 놀고 있는 저 사랑채를 작은 예술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일전에 우연히 방문했던, 작고 아름다운 축제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내가 사는 지역의 ‘학이재(150년 된 지역사회의 문화교육기관)’란 작은 서당으로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오랜 세월을 타지와 타국에서 살다 7년 전 홀로 귀향한 어떤 조각가가 사는 곳이었다. 고향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던 그녀는 정원을 가꾸고 라벤다를 키우다가 문득 프랑스 유학 시절 감명 깊게 보았던 작은 마을 축제를 떠올렸다. 지역에 크고 작은 축제와 행사가 있었지만, 그녀는 작고 아름다운 그녀만의 축제를 기획했다. 그게 바로 4년 전이였다. 빗질부터 팸플릿 제작, 홍보, 전시 그리고 강연 및 문화예술 공연자 섭외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다 보니 ‘학이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관객들이 대규모 행사와 공연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매년 라벤다를 키워, 그걸 판 돈으로 축제를 치렀다.

축제가 중반쯤 진행되자 이번에는 지인들이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라벤다를 심고 가꾸는 분, 행사 때 주차를 도맡아 하는 분, 강연 및 공연자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의 식사를 도와주는 분, 무엇보다 몰래 행사 지원금을 놓고 가는 분 등…. 그러자 결실은 거짓말처럼 조용히 찾아왔다. 올해 다섯 번째 행사는 입소문을 타고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에서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고, 군청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건 근래 보기 드문 작고 아름다운 마을 축제였다. 군 단위, 시 단위의 행사는 규모만 크고 전시행정의 성격이 크지만, 이곳은 작지만 아름다웠다. 오후 해거름, 행사장으로 가는 진입로 주변은 남달랐다. 어스름 노을이 지면서 옅게 깔리는 안개와 자욱한 꽃향기에 취해 나는 마치 수백 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했다. 특히 강변을 따라가는 생태 숲 산책로가 일품이었다. 벚나무 아래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고, 멀리서 본 ‘학이재’는 번잡한 세상사 한가운데 독야청청 서 있는 한그루 소나무 같았다.

결심이 서자, 이번에는 과연 나의 상상력이 실현될지 비슷한 사례를 찾고 싶었다. 아이들이 떠난 다음 주 월요일, 합천으로 출근한 나는 함께 입주작가로 있는 하아무 소설가와 의논했는데 그는 문인 중에, 개인 사저를 문학관 혹은 예술 공간으로 활용한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하동 이원규 시인이 그의 집 별채에, 사진 갤러리 예술 곳간 ‘몽유’를 오래전부터 운영한다며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랑채를 짓는 비용의 삼 분의 이는 내 지분이지만, 아내는 자신이 우리 집의 실세임을 내세워 그곳을 기도실 혹은 그녀와 막내딸 전용 쉼터로 선점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나는 그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시로 마당의 풀을 뽑고 사랑채 청소를 도맡는 등 설득에 앞선 선제조치를 빈틈없이 했다. 아직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본채 앞의 사랑채를 그때 찾았던 ‘학이재’와 같이 우리 집의 작은 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리하여 이곳에 마을 주민이든, 외부인이든 문학과 노래를 좋아하는 이라면 언제라도 방문하여 함께 예술을 누리는 즐거움을 빠져 들고 싶다. 그러니 당분간 아내 앞에서 술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먹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