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도발이 잠들었던 과거사를 깨어나게 했다. 일본 우익과 늘 보조를 맞추던 한국의 소위 보수세력은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강변해왔지만 제 발목을 스스로 과거에 동여맨 일본 우익의 행태에 당황하고 있다. 침착한 대응이라든지 외교적 해법 운운하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뚜렷한 가해자가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데, 이에 대한 피해자 측의 항의를 반일 감성팔이니 단순한 이분법이니 하면서 폄하하는 것이 온당한가? 굴욕과 존엄 사이에 중간은 없다.
일본의 행태와 늘 비교되는 사례가 바로 독일이다. 그간 국가적 차원에서 주변국에 사과를 거듭해온 독일은 전시 강제노역에 관한 개인적 배상에 대해서도 사회적 기금을 조성하는 등 전향적 태도를 취해왔다. 평범한 독일시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많겠지만, 그들은 자기나라를 가해국으로, 주변국을 피해국으로 규정하는 것을 이분법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선을 흐릿하게 하려는 어떠한 궤변도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과 독일은 처한 사정이 같지 않다. 유럽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서로 동등한 관계를 지닌 주변국들과 선린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독일에 비해 주변의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어온 경제대국 일본은 별로 아쉬울 게 없었다. 따라서 ‘인도주의적’ 차원의 보상은 해줄망정 ‘인권’ 유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없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만약 이처럼 한 나라가 처한 객관적 조건이 과거사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면, 현재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독일의 태도가 돌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봐야할까?
독일사회에서 과거사 문제,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로감이 역력한 것은 사실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기성질서와 싸우며 젊은 시절을 보낸 아버지 세대, 소위 ‘68세대’와는 달리 역사와 정치에 무관심한 편이다. 그들 중에는 ‘또 유대인학살 문제냐’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역으로 보면 이러한 거부감이야말로 그만큼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독일사회에서 중요시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하다. 실로 동서독 통일 이후 나치과거 문제에 공산주의 독재의 과거까지 더해졌으니 독일사회의 기억은 더욱 다각화되고 심화되었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이 펼치는 기억의 정치와 문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은 단연 수도 베를린이다. 동독의 한가운데 섬처럼 존재했던 ‘전방도시’에서 명실상부한 통일독일의 수도로 거듭난 베를린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기억의 도시이다.
한 번이라도 베를린 시가지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과할 정도로 많은 추모시설에 놀라움을 느낀다. 베를린은 포스트모던 건축물이 즐비한 첨단도시인 동시에 과거의 혼령들이 살아 숨 쉬는 도시다. 홀로코스트 관련 추모비들만해도 정말 다양하다. 베를린의 관문 브란덴부르크문 남단의 학살된 유대인 추모비와 옛 나치 비밀경찰 사령부 자리에 있는 테러의 지형학 그리고 해체주의 건축으로 유명한 유대인박물관 같은 세계적 명소 외에도 어린이희생자 추모동상, 유대인 남편을 구한 독일인 부인상, 강제이송 추모비, 강제이송 철도선로, 파괴된 유대인회당을 추념하는 거울벽, 유대인들을 보호했던 맹인공장, 추방된 유대인을 기억하는 길바닥의 걸림돌 등 각양각색의 추모시설이 널려 있다. 베를린의 대표적 노선버스인 100번 버스의 한 정류장에는 유명한 나치 학살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대형 사진과 더불어 그 뒷면에 옛 유대교 랍비의 설교가 적혀 있다. “구원의 비밀은 기억에 있다.”
물론 유대인만이 추모 대상은 아니다. 이 기억의 도시에는 장애인, 동성애자, 신티와 로마족(집시)을 추모하는 시설 뿐만 아니라 강제노동 추모관, 베를린장벽 야외박물관, 동독박물관, 독일연방군 기념시설 그리고 동베를린 변두리에 위치한 사회주의자 기념묘지 등도 있다. 한마디로 베를린시 전체가 현대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독일저항기념관인데,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독일인들 자신의 저항과 수난을 추념한다. 같은 건물에는 ‘조용한 의인들 기념관’도 함께하고 있다.
이곳은 독일민족의 명예회복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신티와 로마족을 포함해 양심의 명령에 따랐던 ‘조용한 의인들’까지 각자 자리에서 거악에 맞섰던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흔히 가해자 측은 각종 상황 논리를 내세워 죄를 덮으려 하지만 정작 다채롭게 기억하고 되새겨야할 사안은 거악 앞에 선 피해자의 수난과 저항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이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자산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이분법이라고? 정말 이분법적인 것은 과거를 깔아뭉개고 미래를 논하는 것이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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