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성이 날대로 난 고름집이니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낯 두꺼움과 모르쇠야 대물린 내림이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이놈저놈 말본새도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때가 때인지라 살얼음판 걷는 이웃 형편 잘 알면서 재 뿌리고 초 치는 그 놀부 심술, 돼먹지 않은 오지랖이 더 밉살맞을 뿐이지.

G20 회담 직후 방한한 미대통령 바로 옆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동참하겠다는 문 대통령 발표는 놀라웠다. 말이 좋아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지 실상 중국을 꽁꽁 묶어두자는 봉쇄 전략이다. 중국 눈치도 봐야 하는 처지라 확언을 미루고 미룬 참이었다. 그때 직감했다. 말만 무성한 트럼프-김정은 회동이 가능하겠다. 판문점에서 둘은 만났고 일본의 경제 보복이 뒤따랐다. 참 공교로웠다.

대통령의 동참 발표는 북미 대화의 불씨를 살리려는 고육책이었을 테다. 큰 형님 뒤를 열심히 좇은 일본은 2017년 이미 인도태평양전략을 양국 공동 외교 전략으로 못 박은 바 있다. 제 꾀를 들어준 미국이 고마운 아베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겠지만, 춤 대신 골프장 벙커를 데굴데굴 굴러줬다. 큰 형님, 이제 고분고분하지 않은 막내 버르장머리 손봐드려야겠어요.

그때가 마침 왔고 빌미는 안보였다. 솔직한 말이다. 지금 사태의 본질은 안보다. 되짚어 보면 동아시아의 꼬마 제국이 이웃을 침략한 100여 년 전은 진보 대 야만이 통용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과욕을 부린 일제는 제국주의 본산에 덤비다가 결국 망했다.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 전범과 극우의 생각을 모르지 않았지만 냉전의 가파른 상황에 갈 길 급한 미국은 꼬마를 다독여 일으켜줬다. 그렇게 일본, 한국, 타이완, 필리핀을 쌍무적 방위조약으로 뭉치고 4개국 외무장관 위에 미 국무부가 지휘하는 수직적 체제가 탄생한다. 브루스 커밍스 말이다.

이 체제는 오래전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체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한 것이다. 익히 아는 대로 미국 중심 체제는 미국이 군사력을 대고 지역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큰 이득을 취하는 반면, 동아시아 국가는 무역 우대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총은 미국, 돈은 일본, 노동력은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가 대는 분업 구조에서 미국도 동아시아화된다. 조반니 아리기 말이다.

냉전이 끝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앉았던 자리에 중국이 앉았지만, 옛날 조공책봉체제의 중심이던 중국은 결코 노동력을 대는 데 머물지 않았다. 2000년대까지 유지되던 도광양회 외교는 일대일로 정책 이후 급선회한다.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화한 미국도 세력의 불균형이 바탕이 되어야만 우월적 지위를 유지한다. 압도적 힘을 행사하려면 중심 국가의 시장이 예속국 시장보다 훨씬 커야 하는데, 비등한 규모의 거대 시장이 둘이 생긴 결과다.

1학기를 마치는 날 중국인 대학원생이 진지하게 미중 무역 갈등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다. 솔직한 말을 원하느냐 물으니 당연하다는 대답이다. 국가 간 헤게모니는 특정 국가의 생산, 무역, 금융, 군사력이 타국보다 더 효율적인 상태를 말하지만 중국은 아직 미국보다 우월하지 않으니 시기상조였다. 중국은 더 길게 봐야 한다. 또한 헤게모니는 갈등이 발생하는 쟁점을 보편적 차원에서 해결할 도덕적, 지적 능력을 보여줘야 가질 수 있다.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는 말인데 최근 200년 동안 중국은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요원하다. 이기는 쪽이 우리 편이다.

1945년 이후 성립한 동아시아 체제에 마침 생긴 거대한 균열은 일본에게 위기일 뿐이다. 미국이 그간 줄기차게 내놓은 의제는 지역 안보였고 그에 편승해 지역 패권의 하청업자 자리라도 노려볼까 싶은 일본의 의제도 안보다. 연합 훈련을 핑계로 영공을 침범해가며 동해를 날아다니는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나 하릴없이 쏴대는 북한 미사일도 안보 프레임에 갇혀 있긴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가까운 과거만 있지 미래는 없다.

딱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이것은 위기일까? 위기라고 느낀다면 1945년 체제가 편안한 나머지, 제국주의 침략까지 미화하고 옹호하다 못해 과거의 민족적 시련도 잊은 우익 소아병에 걸린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반대로 기회라고 느낀다 하더라도 의제가 없다면 허망한 노릇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일본이 예전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한편 들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셈판이 그랬다. 더구나 평화헌법을 오매불망 내팽개치려는 우익의 책동이 너희 미래를 말아먹는구나 싶었다. 이제껏 겪고 있는 우리 고통이 너희에게서 비롯했고 우리를 평화 의제로 전진하게 만들었는데, 너희는 그렇지 못하구나, 아직 혼이 덜 났구나 싶었다. 그래서 분노하기보다 안보에 목매는 저들을 사람이라면 가엽게 여겨야 한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