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논의 벼가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익어간다. 가을에 태어난 덕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어떤 계절보다 가을을 좋아한다. 사실 어느 시간인들 찰라가 아닐 리 없지만 식물에게 단풍이 드는 시간은 겨울 동면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절정의 순간이다. 식물은 정확하게 이때를 맞춰 녹색 엽록소를 빠르게 제거하고, 붉게 노랗게 다른 색을 입는다. 이걸 우리는 단풍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과연 식물이 시간의 흐름을 알고 때를 맞추는 것일까를 궁금해 왔다. 그리고 많은 실험을 통해 이제는 식물이 정확하게 시간의 흐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물은 과연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고 그리고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식물은 하루 동안 비춰지는 빛의 시간과 온도의 상호 관계를 통해 계절의 흐름을 파악한다. 이 원리로 계절이 북반구와 반대로 가는 남반구로 식물을 옮겨 놓아도 식물은 계절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셈이다. 식물이야말로 어떤 생명체보다 지구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온도, 비, 바람, 빛을 감지해 생존 능력을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계절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절할까? 식물은 빛의 양이 줄어들고, 기온이 내려가면 성장 억제 호르몬을 만든다. 이 억제 호르몬은 식물이 더 이상 싹을 틔우거나 몸집을 성장시키지 않도록 한다. 끝내는 동면에 들어가 최소한의 신진대사만 유지하도록 만든다. 식물을 둔화시키고, 마치 죽은 듯 모든 걸 멈추게 하는 마이너스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빛이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온도가 따뜻해지면 이제는 성장을 촉진하는 호르몬을 만들어 내 그간 식물을 누르고 있던 억제 호르몬을 몰아낸다. 이때 촉진 호르몬이 대세로 작용하면 식물은 재빠르게 싹을 틔우고, 잎과 가지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나무들의 가지에는 벌써 싹을 틔울 기초가 되는 눈망울이 맺혀 있다. 금방이라도 싹을 틔우겠다는 자세지만, 꼼짝 않고 이대로 겨울을 보낸다. 겨울에 날이 반짝 따뜻해져도 속지 않고 싹을 틔우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억제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내년의 어느 따뜻한 봄날, 마침내 안심할 수 있는 기온이 확보되면 싹을 틔운다. 이때는 촉진 호르몬이 억제 호르몬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설령 갑자기 날이 추워져도 멈추지 않고 굳건히 성장을 지속한다.
서로를 견제하는 억제와 촉진의 호르몬은 식물의 몸에 공존한다.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파악하여 견제 속에 균형을 맞춰간다. 만약 겨울이 오고 있는 지금 여전히 촉진 호르몬이 식물을 강하게 점유를 하고 있다면 계속해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다,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이 불행을 억제 호르몬이 막아내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성장과 촉진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식물은 잘 알고 있다.
영국에서 가든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동료의 디자인 발표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의 디자인 주제는 ‘불행과 행복의 그 어디쯤’이었다. 이 애매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했다. 마지막 디자인 발표가 있던 날, 그가 가져온 답은 우리의 행복은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 불행과의 동행이라고 했다. 불행을 겪고, 이 불행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지극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가 어떻게 ‘불행과 행복의 어디쯤’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정원 디자인 작품으로 풀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당시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 힘겨움을 이겨내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장과 촉진만이 우리 삶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살다 보면 때때로 억제되고, 멈추어 있는 듯한 동면의 시기가 찾아온다. 마치 식물에게 억제 호르몬이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 순간 우리는 적어도 그것이 불행이고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그 억제의 시간 속에 주저앉지 않고 기다려 다시 어느 봄날 적당한 어느 때에 다시 싹을 틔우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만 있다면 우리 삶은 그리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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