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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태풍 이긴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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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은 자못 감상적이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8월 15일, 그는 신하 강혼에게 붓과 먹을 상으로 내린다. 전날 ‘바람이 가린 그늘 쓸어 버리니, 가을 달이 다시 밝다’는 시제로 율시를 짓게 했는데, 강혼의 시가 자신의 뜻에 부합했다는 이유에서다. 연산군은 강혼에게 ‘가을 동산에서 국화를 보고’ ‘달밤에 기러기 소리를 듣고’ ‘수레를 멈추고 단풍을 구경함’이라는 시제를 주고 시를 짓도록 또 하명했다. 그는 ‘윗사람을 능멸한다’며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일으켜 선비 128명을 죽인 폭군이었지만, 가을 바람과 단풍 앞에선 설레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단풍은 그래서 강하다.

‘비 내린 가을 산에 우수수 잎이 지니/비단 위에 다시 꽃을 보탠 듯 사랑스럽구나/단풍나무 숲 읊은 시구가 회자되지만/단풍이 2월 꽃보다 붉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네’. 고려 말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색(1328~1396) 또한 단풍에는 약했다. ‘수레를 세우고 앉아 단풍 숲을 보니/서리 맞은 잎사귀가 2월 꽃보다 붉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산행’을 차운해 지은 이 시에는 붉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찬란한 가을 산의 향연에 매료된 그의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가을 바람 매섭다 한들 내 어이 시드리까?/뜨거운 한 줌의 마음이 오히려 불이 되어/가을 산 불 붙이듯 나 홀로 타옵나니/행여나 멀리 계신 님 이 속 알아주소서’. 일제강점기에 감상적 미문으로 문명을 떨쳤던 시인 노자영(1898~1940)의 단풍 사랑도 남다르다. 1938년 펴낸 시집 ‘백공작’에 실린 ‘단풍’이란 제목의 이 시는, 그가 자신의 연인에게 보낸 사랑의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단풍은 태풍보다 강했다. 태풍 ‘미탁’을 이긴 단풍은 승전을 자축하듯 붉디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설악산을 출발한 단풍은 하루 20~25㎞의 속도로 남하하니, 이달 하순이나 내달 초순이면 부산·경남·울산의 산에서도 단풍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화를 일으킬 듯 격렬한 ‘조국 정쟁’에서 벗어나 가을 산으로 눈길을 돌려 보자. 가열될수록 진실이 묘연해지는 조국 정쟁과 달리 단풍은 날이 차가워질수록 더 순정하고 아름답다. 하여, 이원규 시인의 시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이 가을, 우리는 ‘시퍼런 불행’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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