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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시커먼 흙, 시커먼 기억 /배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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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산사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착한 현장은 ‘시커먼 흙’으로 가득했다. 흙 아래에 오랫동안 감춰졌던 계곡물과 섞인 검은 진흙은 악취를 풍겼다. ‘지형 특성상 그런가 보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뿐. 주민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덤프트럭이 수시로 이곳에 석탄재를 가져다가 묻었어. 여기 사람은 다 알아.”

지난 3일 오전 무너져 내린 부산 사하구 구평동의 한 야산은 엄밀히 말해 ‘산’이 아니라 ‘인공지형’에 가까웠다. 앞서 현장 원인 조사를 진행한 대한토목학회 부울경지회도 원지반(계곡)에 얹힌 성토부(석탄재)가 붕괴하면서 사고가 났다는 잠정 결론을 내놓았다. 석탄재가 호우로 물기를 머금으며 점착성이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자연스럽게 계곡수가 흐르는 산골짜기에 석탄재를 쌓아 ‘시커먼 흙’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주민은 예전부터 산 정상 부근에 있는 군부대에 책임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감천화력발전소에서 나온 석탄재를 이곳에 묻어 확보한 부지에 연병장을 넓히기도 했다는 것이다. 확인 결과 군이 과거 교육법인 소유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부지 사용에 대해 동의를 받은 정황도 나왔다. 특히 과거 인근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제보자는 석탄재를 매립한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뚜렷하고 선명한 기억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억 저편의 ‘시커먼 기억’이다. 해당 사안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에 육군 53사단 측은 “너무 오래된 일이고 당시에 근무하던 사람도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고 답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군의 결정에 이견을 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는 한마디에 명확한 원인 규명은 힘들게 됐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기록이 남지 않은 그때의 행동이 지금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사하구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장림고개, 을숙도 등 과거 폐기물이 묻혔을 가능성이 큰 곳을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구 관계자는 “과거 관행에 따라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지금 모두 확인하는 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 남은 ‘시커먼 흙’과 그 속에 묻힌 ‘시커먼 기억’. 이를 바라보는 유족과 시민의 마음도 시커멓게 타 들어 간다.

사회부 heat89@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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