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아태해사중재센터의 해사중재규칙 설명회가 있었다. 센터 설립에 티스푼 하나 정도는 얹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중재규칙이 대법원 승인을 받고 이를 알리는 이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내 눈에는 부록으로 소개된 ‘내항해운용 계약서식’이 눈에 더 들어왔다.

15년 전쯤에 해양오염방지법 위반 사건에 대한 소송 자문을 하면서 내항해운계약이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양오염에 누가 책임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계약서 제목은 장비사용계약서였지만, 내용은 정기용선계약에 가까웠다. 계약서는 몇 줄이 되지 않았지만, 법학자의 눈에는 조악하고 부실하게 보였다.

내항화물선 사용계약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100여 종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업계에 돌아다니는 서식에 적당히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을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형식으로 계약이 체결되고 있다. 계약서 제목과 내용이 불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계약 내용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책임의 주체와 비용부담자가 계약의 성질에 부합되지 못할 경우에는 피보험이익의 존재 여부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 보험금 지급과 관련해서도 법적 분쟁이 생기기 쉬운 상태였다.

필자는 그 당시부터 한국해운조합에서 정형화된 표준계약서식을 개발해 보급할 것을 권고해왔다. 또 아태해사중재센터 설립 과정에서도 해사중재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해운계약서에 해사중재조항을 삽입할 필요가 있는데, 중재센터에서 이를 포함한 표준계약서식을 개발해 보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가 해사중재규칙 설명회에서 부록으로 제안된 3종의 계약서식으로 보인다.

선박을 이용하는 계약은 선박 자체만을 임대차하는 선체용선계약과 운송서비스나 도급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선체용선계약은 선박 자체의 점유권을 용선자에게 넘기면 용선자가 선박 운항에 책임을 지는 계약인 반면, 정기용선계약이나 항해용선계약 등은 선박소유자가 선박 운항에 책임을 지고 위탁된 화물의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약이다. 따라서 선박운항에 대한 책임의 주체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시중에서 쓰이는 내항해운계약서는 우선 계약 명칭부터 장비임대차계약 용선계약 운송계약 등 다양하고, 그 내용도 계약서 명칭과는 다르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계약이 이렇게 된 이유는 적은 용선료로 많은 서비스를 제공받으면서, 선박운항에 따른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용선자(화주 측)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되어 계약 내용이 변형됐기 때문이다. 화주 측(용선자) 입장에서 용선료를 적게 주기 위해서는 선박만을 임차하는 장비 임대차계약이 유리하고, 더 많은 서비스와 선박 운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선박소유자 측에서 선박을 운항하고 운송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송계약이나 도급계약이 유리하고, 보험료 부담을 지지 않으려면 선박소유자가 보험에 가입하는 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시중에서 쓰이는 내항해운계약서는 이러한 부분이 모두 계약의 특성이나 논리적 체계와 무관하게 계약 당사자의 편의에 따라 혼합돼 담겨 해양사고나 계약 해지 등의 사유가 생길 경우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때문에 계약의 성질에 맞게 당사자의 권리의무와 비용 부담에 대한 기본원칙을 확립한 표준계약서식을 만들고 보급할 필요가 있다. 계약 종류에 따라 선박보험과 책임보험의 피보험자가 누구인지, 누가 보험계약 당사자가 돼야 하는지도 예시하는 그런 표준계약서식의 필요성을 늘 얘기해 왔다.

적어도 이번에 개발하고 보급하려는 용선계약서식이 내용 면에서 어느 정도 현행 법령과 계약법 원칙에 맞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진일보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내항해운계는 항상 화주 위주의 시장이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시장에서 표준계약서식에 바로 반응하기는 어렵다. 요즘과 같이 경제가 어려운 여건에서 공정한 거래를 기대할 수 없는 시장 상황이 그대로 굳어지면 시장은 고사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제도와 행정을 통해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화주와 선박소유자 사이에 공정한 거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이라면 적어도 정부가 표준계약서식을 개발하고 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해수부와 산자부가 합의한 표준계약서식을 정부가 공인하고 해운법에서 사용을 의무화하는 것은 어떨까?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