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설렘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새해를 설렘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이 있다.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라는 왕관을 쓴 베이비 부머 세대이다. 그들은 한 번의 직장이 평생직장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고, 그 길이 끝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살다가 그들의 부모처럼 조용히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막상 다가온 그들의 은퇴는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살아갈 날이 언제까지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100세 시대의 생명과학이 펼치는 수명 연장의 미래도 불안하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 외치는 것도 모자라 인생은 한 번만 사는 것이라는 욜로(You Only Live Once)족으로 변해버린 자식도 믿고 살 수 없다. 변변한 소득 없이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는 오래 버티기도 힘들 것 같다. ‘이게 아니었는데! 이게 아니었는데!’ 수없이 되뇌어 봐도 별로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인다. 최선을 다했으나 쓸모없이 버려져 신세가 초라해진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선택해 살아온 길보다 눈감아 버리고 떠나온 그 길이 더 나았던 것 아닐까? 아무리 힘들어도 ‘하면 된다. 되지 않으면 되게 하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평생, 오직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성실히 살아온 평생, 자식들은 나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희생으로 살아온 내 평생, 혹시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후회와 두려움으로, 은퇴라는 퇴짜를 맞은 영웅들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져 간다.

인생길은 선택의 길이고 그 선택은 때로는 비정함을, 때로는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노래했다. 우리는 오래전 아름답게 보였던 두 길 중 하나를 버리고, 더 나아 보이는 하나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의 시(詩)처럼 노란 숲속에 난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이제 그 길이 끝났다. 우리는 그것이 마지막이고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은퇴로 알고 살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변화는 ‘가지 않은 그 길’을 ‘내일의 길(The Road to the Future)’이라는 예기치 않는 선물로 만들어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산업의 근본을 뒤흔드는 파괴적 혁신과 지식·정보 공유가 기하급수로 확산되는 4차 혁명으로, 별 가진 것 없는 은퇴자도 죽지(?) 않고 다시 걸을 수 있는 또 한 번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긴 여정에서 만나는 하나의 종착역에서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듯, 은퇴라는 인생 정거장에서 부활의 길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그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일까? 또다시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는 치킨게임과 같은 험난한 길일까? 또 무엇인가 속여야만 하는 고통의 길일까?

은퇴자들이여!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세상의 변화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귀 기울여 보자. 아마 착한 일을 하지 않고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얻을 수 없는 세상이 왔음을 알 수 있으리라. 우리가 택해야 할 새로운 길은 명확하다. 우선 좋은 일을 하고 다음으로 돈을 버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사업(social business)’의 길이다. 사회혁신가, 사회적기업가, 체인지메이커(changemaker). 단어는 달라도 뜻은 한 가지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도랑 치고, 게 잡는 일’이 은퇴의 왕관을 쓴 그대가 가야 할 ‘가지 않았던 미래의 길’이다.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면 세계의 창문을 열어보자.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대중잡지도 있고, 불우한 청소년을 요리사로 만들어 창업한 레스토랑도 있다. 필설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성공모델이 존재한다.

그때 한창 젊었을 때,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을 때, 우리는 길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천지가 뒤바뀌었다. 그때,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새로운 길을 나서기 전에 대문을 열고 골목을 빗자루로 쓸어볼 일이다. 어찌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책 속에 금은보화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독서의 유용함을 표현함)뿐일까? 내가 선택한 그 착하고 ‘고운’ 길이 자유천종록(自有千鍾祿)일 것이다.

부산대 경영대 교수·사회적기업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