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를 가자고? 집 앞에 대추 말려야 되는데?”

엄마한테 전화해 같이 미국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이다. 이때 엄마는 마당에 있는 네 그루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추나무가 네 그루나 있는 마당을 가진 집에, 그것도 혼자서 산다면 우리 엄마는 부자인 걸까.

부자는 아니다. 이 집은 실내가 8평 남짓이고 지은 지 60년이나 됐다. 문풍지를 바른 문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유일한 난방인 아궁이는 고장이 나서 쓰지 못한다. 수도도 고장이 나서, 물을 쓰려면 근처 밭에까지 나가야 한다. 부자는 아닌 셈이다. 마음이 부자인 건가.

강원도 산골에 있는 이 집은 엄마가 태어나 자란 고향집이다. 몇 년 전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사람이 살지 않아 쭉 비어 있던 집인데, 엄마가 작년에 혼자 들어가 살았다. 비었던 집을 청소하면서 몇 개월을 지내다가 내가 같이 미국에 가자고 전화를 걸었을 즈음에는 대추를 따서 말리고 계셨다.

엄마는 대추가 다 말라야 여행을 갈 수 있다고 했고, 결국 대추가 다 말라서 지금 엄마와 나는 미국에 와 있다. 미국 얘기는 있다가 하기로 하고 일단 대추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이 빛깔 좋고 실한 대추는 엄마가 큰이모 댁에 드렸다. 그리고 큰이모께서는 (대추와는 별개로) 금세 밖에 나가 수육 한 덩이를 사서 우리가 이모 댁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삶아놓고 계셨다. 단편적인 얘기지만, 내가 느낀 외가의 분위기는 항상 이랬다. 서로 챙기는 게 몸에 밴 것 같았고, 이모나 외삼촌을 만날 때면 항상 사랑받고 보살핌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7남매 중 막내인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엄마가 겪은 세상은, 여기서 자세히 얘기하진 못하지만, 가족과 있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그런 일이 많이 쌓인 데다가 갱년기까지 겹쳐서 그런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쯤부터 엄마는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때부터 엄마가 예전의 엄마로 느껴지지 않았고, 솔직히 많이 싫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예전의 엄마는 여러모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본가 책방에 가면 두 벽면이 모두 책으로 꽉 차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EBS 장학퀴즈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이 엄마의 공이었다. 그 책방은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엄마가 거의 다 꾸려놓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예전의 엄마는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고향집에 내려가 몇 개월 살면서 조금 기운을 차리시기에, 이번에 여행을 같이 가서 시간을 보내면 엄마의 다른 모습,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엄마가 여행 제안에 수락을 해 같이 미국에 왔다.

그런데 솔직히, 4주째 같이 여행하고 있지만 아직도 엄마랑 있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친다. 사고방식도 나와 맞지 않고 관광지에 있는 동안에도 툭하면 옛날 얘기, 힘들었던 얘기, 부정적인 얘기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쉴 새 없이 쏟아내,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최근 10년 동안 대화가 없다가 이번 여행으로 둘 사이 거리가 갑자기 좁혀져서 그런가보다, 가까워지는 과정인가보다 생각하면 좀 견딜 만하다. 무엇보다 막내 이모께서 내게 엄마의 상태에 대해 언질을 주셨던 게 있어 조금이나마 더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처음 예상보다는 많이 힘든 여행이 됐지만, 이 멀리 미국까지 나와서야 조금이나마 엄마 얘기를 듣게 돼서 다행이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힘들겠지만 앞으로 천천히 엄마랑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오면 엄마는 다시 고향집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신다. 아주 천천히 빗자루질도 하고 밭에서 흙도 고르고 하다 보면 엄마의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 같다. 엄마 스스로도 지난 몇 개월간 그렇게 됐다고 하시니까 말이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를 낳아준 집이 그리워 그 집을 천천히 다시 보듬으러 간 것처럼, 나도 엄마에게 다가갈 시간과 여유가 좀 더 있으면 좋겠다.

동아대 의학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