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만엔권 지폐에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게이오대학 창설자로 사상가인 그는 일본의 근대 자본주의 변혁기, 근대화의 시대정신을 심어준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후쿠자와가 일본인에게 심어준 정신은 무엇인가?

첫째는 ‘독립자존(獨立自尊)’이다. 국가나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힘으로 홀로 서라는 것이다. 자신도 맨손으로 벌어먹기 위해 안마를 배웠다. 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학교를 열며 처음으로 수업료를 받았다. 그때까지 입학 때나 명절 때 스승에게 간단한 예물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수업료를 대신해 온 관례를 깬 것이다. 그는 막부에 의존해 살던 계층들에게 이제는 홀로 서라고 외쳤다. 홀로 설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도 인정받는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둘째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이다. 이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권리와 의무가 평등함을 이르는 말이다. 봉건제도 아래, 하급 사무라이 계급의 설움을 겪은 후쿠자와는 문벌과 출신을 넘어 개인을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서양 문명에 깊이 끌렸다. 그는 서양의 평등사상의 의미를 내가 중요한 만큼 남들도 소중하다는 뜻으로 가르쳤다. 일본에 자본주의 서양 사조가 밀려들 때, 이것이 남을 배려하는 관용 정신으로 힘을 발휘했다.

최초 일본 유학생으로 게이오에서 후쿠자와의 지도를 받은 유길준(兪吉濬), 그는 1882년 귀국하자마자 선진 서구문물을 전하기에 바빴다. 그는 ‘회사규칙’에 이어 ‘회사설’을 발표해, 산업 발전을 위해 근대적 회사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러 사람의 자본을 모아 전문가에게 맡겨 경영하는 주식회사 설립을 독려했다. ‘국권’이란 논문을 통해 국가는 자주권, 독립권, 재산보호권, 입법권, 외교·통상권 등의 국권을 갖는 ‘완전 자주독립국’이어야 한다는 근대국가 개념을 소개했다. 또 ‘경쟁론’에서는 진보와 발전이 경쟁에서 비롯된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설명했다.

영어 ‘competition’을 ‘경쟁’으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후쿠자와였는데, 당시 지식층은 겨루고 다툰다는 이 단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유길준은 1895년 출간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경쟁’ 대신에 ‘경려(競勵)’라는 새로운 용어를 썼다. ‘겨루며 격려한다’는 ‘경려’는 공정 경쟁의 의미다. 그는 경쟁에는 규칙이 있는데 교육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했다. 유길준은 일찍이 근대의 핵심 가치인 국민주권 국가와 자본주의 발전원리를 애써 논했지만 대중은 무관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유길준에게 자신이 쓴 ‘문자지교(文字之敎)’를 번역해 조선에 소개해보라고 했다. 이 책은 아동에게 문자와 짧은 문장을 가르치는 초등 교과서다. 백성을 깨우치려면 쉬운 말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와 갑오·을미개혁 때 단발령 등에 반발해 의병이 일어난 것을 본 유길준은 민중과 소통하며 시대정신을 전파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 신문 발간에 관여하고,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창설해 국민 계몽활동을 펼쳤지만,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교육받지 못한 민중을 위한 야학이었다.

그는 1908년 야학 교재로 ‘노동야학독본’을 냈다. 한자어조차 우리말로 쉽게 풀어 쓴 이 책은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신령하니라”로 시작한다. 그가 근대화의 가치 중 가장 중점을 둔 것은 3가지였다. 이를 4·4조 노랫말로 지어 대중의 머릿속에 넣고자 했다. 첫째는 권리·의무 등 여섯 가지 사람 된 도리를 다하자는 육조가(六條歌)이다. 둘째는 애국가다. 당시 국권이 흔들릴 때라 특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했다. 셋째는 노동가다. 노동은 거룩하니 최선을 다해 일하라는 것이다.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 애국하며 놀지 말고 일하라는 명쾌한 메시지다.

시대 흐름에 따라 대중의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시대정신이다. 근대화의 변환기, 시대정신의 유무가 국가의 명운을 갈랐다. 유길준은 민중에게 간단명료하게 시대정신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배층 간 명분과 권력다툼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변화의 결정적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니혼대학 상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