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원 살구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2층 베란다에 서면 내 키와 내다보이는 살구나무의 키가 얼추 같아 꽃을 눈앞에 두고 감상한다. 아침이면 직박구리가 찾아와 꽃을 따먹으며 지저귀고, 검정과 흰색의 예쁜 옷을 입은 어린 박새는 두리번거리며 먹이를 찾느라 나무 껍질을 쫀다. 잠시 그러다가 아파트 청소 아주머니가 마련한 대야로 날아가 물을 마시기도 한다. 박새의 새끼는 이소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다.

지난 입춘 지절에 딸아이가 운 좋게 공직시험에 합격하여 경남 거제로 발령이 나 새봄에 집을 떠나게 되었다. 딸아이는 김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다.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의 사립대학에서 계약직으로 짧은 기간 근무한 것까지 내처 사반세기 이상을 김해에서 보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김해를 떠나 타 지역의 대학을 가길 원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한 나로서는 생활비를 댈 자신이 없어 만류하였다. 그 대신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주마 하고 설득하여 지금까지 한솥밥을 먹었다. 어학연수 기간에는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생활비를 아껴 공항 면세점에서 값비싼 양주를 사 온 아이였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워 의자에 앉아 공부하다 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살이 찌고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딸, 살이 많이 쪘네. 살 좀 빼지” “딸, 온 집안에 머리카락이 수북하네, 청소 좀 하지”하며 나무랐고, 어릴 적 사준 책상이 낮아 불편하다며 거실의 식탁에 나와 공부할 때에도 “딸, 아빠 TV 봐야 하는데 방에 들어가 책상에서 공부하지”하면서 지청구만 해댔다. 자식인 딸을 건사해야 하는 아버지로서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죄스럽고 미안하기도 하다.

이젠 평소에 잘해주지 못한 마음을 뉘우치며 딸을 보내야 한다. 보낼 채비를 위해 봄을 맞이한다는 우수 절기에 아내와 나 그리고 딸은 방을 구하러 거제도로 향했다. 창망한 바다의 풍광이 좋은 거가대교를 지날 때는 상쾌하면서 슬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딸아이가 어려운 시기에 직장을 구해 마음의 짐을 들어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며칠 후면 집을 떠난다는 감정 때문이리라.

거제에 도착하여 다행히 딸아이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 방을 구했다. 부동산에서는 거제도의 조선 경기가 살아나고 있어 방 구하기가 힘들다고 했는데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경기가 살아났으면 하는 열망이지만 불투명한 느낌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이 지나 다시 거제도로 가서 작은 침대와 이부자리 그리고 가재도구를 마련해주었다. 집안 곳곳 깨끗이 청소도 해주고 왔다.

바야흐로 떠나보낼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 생겼다. 여가생활이나 업무에 필요한 인터넷 연결과 삐뚜름하게 달린 커튼의 수리 등이었다. 아내는 혼자 생활하게 될 딸아이가 불안했던지 이일을 나에게 맡겼다. 딸아이가 처음 출근하는 안날 하룻밤을 딸아이 방에서 자고, 출근 후 이 일을 처리해 주었으면 했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나도 그럴 마음이 있었다.

첫 출근 전날 어둠을 뚫고 거제도로 향했다. 이슬비가 간간이 내려 가로등 불빛이 흐릿한 거가대교는 평상 위에 홀로 앉은 노인네처럼 유적해 보였다. 도착하여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나와 딸아이는 방에 나란히 누웠다. 딸아이는 새로 가져보는 자기 침대 위에 누웠고, 나는 홑이불을 바닥에 깔아 딱딱한 방바닥에 누웠다. 등이 배겨도 한 공간인 것이 좋았다. 난생처음으로 다 큰 딸아이와 단둘이 잠을 자보는 것이다. 어릴 적에도 가족들과 함께 자보긴 했지만 단둘이 자본 기억은 없다. 이런 기회가 또 생겼으면 하는 희망이 그립기도 하겠다.

낯선 분위기라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딸이 “아빠, 잘 키워 줘서 고마워. 아빠는 글을 잘 쓰니까 이 상황을 글로 써보면 어때?” 한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일 출근해야 하니 그만 자” 했다. 딸은 자기 아빠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리고 이따금 역설로 표현한다는 사실도 아는 모양이다.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고였다. 형광등을 끈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도 가만히 ‘잘 커 줘서 고마워’라고 반응하며 괭이잠이 들었다.

아침 해가 밝아 해결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고 왔다. 이소한 어린 박새같이 새봄을 맞아 세상 속으로 처음 뛰어든 우리 딸과 우리나라의 딸 아들들에게 감히 고해본다. 살구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붕새처럼 세상을 훨훨 날기를…. 항상 건강하여라.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