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고개 숙인 이재용’. 지난 7일 국제신문 1면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장면이 실렸다. 보통 1면 머리기사는 지역 이슈가 차지하는데 ‘삼성이 고개를 숙이다니, 톱뉴스가 될 만하지’라고 수긍하면서도 갑자기 왜 무엇을 사과한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기사는 이번 사과 발표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권고에 따른 것이라고 전했다.

세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며 ‘각오’를 읽어냈지만, 법적 시인을 피하고자 하는 용어가 많고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했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내용을 보면서 재벌가에 태어나 경영 세습을 받은 당사자도 어찌 보면 행복한 인생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날 국제신문이 사설에 썼듯 ‘진정성을 믿고’ ‘사과 내용을 실천으로 옮겨 국민 기대에 부응’하기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같은 달 10일 자 경제면에서 다시 이재용 부회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삼성-현대차 전기차 배터리 동맹’. 재계 1, 2위 그룹이 산업 육성을 위해 손잡았다며 이재용-정의선이 사업 목적으로 회동한 것은 처음이라 했다. 19일 경제면 ‘중국으로 날아간 이재용, 한국으로 복귀한 신동빈’. 대기업이 코로나 이후 급변할 시장에 대비해 선제적 투자에 나섰는데 가장 먼저 움직인 이가 이 부회장이란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의 말을 빌려 과감하고 공격적인 투자는 수치로도 확인된다고 했다. 이 기사들은 이재용을 변호하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경제면이니 삼성전자라면 주요한 취재처일 테고. 뭐 나쁜 기사는 아니잖아, 하면서도 개운치가 않다. 대국민 사과 이후 광폭 행보 같은 뉴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 사람이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차대한 역할을 하니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 동맹’ 제목은 국제신문뿐 아니라 조선일보 국민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MBC도 썼다. ‘중국으로 날아간’ ‘코로나 뚫고 중국으로 날아간’ ‘중국 공장으로 날아간’ 이재용. 이 제목도 매체마다 엇비슷하다. 다른 매체를 찾아봤더니 재계 관계자, 삼성전자 안팎의 말이라며 “전사적 역량을 결집해도 위기 극복이 쉽지 않은데” “국내의 여러 상황에 발목 잡힌 이 부회장의 답답한 심경”이라고 토로하고, “혹시 있을 걸림돌을 없애고 다각적인 지원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대변한다.

퍽 노골적인 경제지 뉴스에 비하면 국제신문이 비교적 객관적이고 건조한 말을 골라 정보 위주로 실었다고 보인다. 정보 자체는 뉴스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도 든다. 하지만 매체별로 논조 수위는 다르다 해도 잘 만들어진 보도자료를 친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대기업 삼성발 소식은 거의 모든 매체가 받아 쓴다는 데 위력이 있다.

소수의 목소리는 왜 싣지 않느냐고 하면 언론사는 ‘거기는 보도자료를 낼(뉴스를 발신할) 역량이 안 된다’ ‘제대로 된 인터뷰이를 찾기 힘들다’는 대답을 종종 한다. 공론장 역할을 한다는 신문에서 말할 역량이 있는 자가 더 많이 말할 기회를 가진다면, 역설이다. 절실하게 말하고 싶지만, 설득력 있게 세련되게 표현할 방도가 없는 이들을 대변하는 게 언론의 역할 아닌가.

지난 주말 이재용 부회장 집 앞에서는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다. 삼성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공동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장기집회 신고를 냈다. 맨날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 농성하는 것도 힘들고 날도 좋으니 텐트 치고 고기를 구우면서 야영을 하겠다는 거다. 집회 이유는? 삼성이 고공농성을 하는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 문제 해결을 놓고 마침내 합의서를 쓰자고 했으면서 일방적으로 연기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대국민 사과 일주일 뒤의 일이다.

이 소식은 한겨레, 미디어오늘 등 몇몇 매체에만 실렸다. 이 농성을 두고 ‘폭식투쟁’이라고 보도한 매체는 뉴스1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국민일보 중앙일보 조선비즈 서울경제 한국경제 매일경제 머니투데이 뉴시스 등이라고 한다. 대책위는 이재용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며 이재용 부회장 구속을 요구한다. 이대로 이달을 넘기면 김용희 씨의 고공 농성은 1년을 채울지 모른다. 부산민언련 사무차장·독자권익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