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내몰림’이라는 말이 있다. 어감은 고우나 뜻은 슬픈 말이다. 대도시 낙후 지역을 개발하면 그곳에 터 잡고 살던 가난한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소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잘 된 번역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이나 지식인 등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최근 어느 일간지에 실린 원고지 20장쯤 되는 기사에서 무려 25개 영어 낱말을 그대로 썼다. 미국에서 교수를 지낸 필자도 알 수 없는 영어도 있었다. 언어 사대주의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세월이 지나면 토씨를 제외하고는 온통 영어 단어가 나열되는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우리말과 외국어를 섞어 사용하면 외국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래서는 어리석은 백성도 제 뜻을 쉽게 전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에도 어긋나게 된다. 한글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빛나는 우리 문화유산이다.
우리 조상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썼다. 현재 사용하는 ‘분식회계(cosmetic accounting)’의 경우 분식은 이두로 ‘반질(反秩)’이라고 쓰고 ‘번질’로 읽었다. 분과 발음이 비슷한 반(反)으로, 질은 쟁기질 다듬이질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의 질(秩)을 빌려 표기했다. 분식회계의 순수한 우리말이 번질회계다. 이익이 적게 나도 많이 난 것처럼 번질번질하게 만드는 장부 조작이 번질이다. 분식회계보다는 번질회계가 실체를 더 정확히 표현하는 용어인데도 일본에서 들여온 분식회계가 일반화돼 있다.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말을 한자로 바꾼 불행한 개악이 두 번 있었다. 신라 경덕왕(재위 서기 742-765) 때 우리 말의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지금 경상남도 밀양은 당시 이름이 ‘밀불’이었는데 밀성(密城)으로, 경상북도 상주는 ‘모래벌’이었는데 상주(尙州)로 바꾸었다. 그래도 우리말 이름이 면면히 전해왔으나 일제강점기에 전면적으로 한자로 바꾸었다. 필자 고향의 정겨운 마을 ‘꽃마실’은 화촌(花村)리로, ‘달안’은 월내(月內)리가 되었다. ‘달안’은 조각달이 휘어진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모리 아리노리(森有札 1847-1889)라는 일본 사람이 있다. 일본 개화기에 최초로 서양식으로 결혼해 화제를 뿌린 멋쟁이였는데 유창하게 영어도 구사했다. 당시 아시아를 넘어 서양을 본받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가 화두였던 일본에서 이 사람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일본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상용어로 쓰자는 개혁안을 들고나왔다. 탈아입구를 가속하자는 방책이었다. 물론 실패했고 이 사람은 암살당했다.
서울 거리 간판은 외국어 투성이다. 너무 지나치다. 아파트 이름은 말할 것도 없다. 오죽하면 외국어를 모르는 시골 사는 노모가 서울 아들 집 찾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 며느리들이 요청한 결과라는 우스개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에도 15년 전 영어 상용을 주장한 소설가가 있었다. 그 소설가는 영어로 소설을 쓸 작정이었을까?
대일항쟁기 우리글 우리말을 지키는 것은 항일 투쟁의 핵심이었다. 1936년부터 공식 석상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1938년에는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됐다. 일제의 발악이었다. 1942년 일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던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내란죄로 기소했다. 두 분은 옥사했고, 열 한 분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우리말 사전 편찬에 관여했다는 것이 이분들이 지은 ‘죄’였다. 우리말을 지키고자 헌신한 이분들의 모습을 최근 개봉한 영화 ‘말모이’가 잘 묘사했다. 사전의 순우리말이 ‘말모이’다. 대일항쟁기 참담했던 현실에 비춰 광복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 외국어를 아무런 생각 없이 섞어 쓰는 것은 스스로 우리말을 버리는 지각없는 행동이다.
우리말을 갈고 닦는 일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언론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사 편집자는 분별없이 외국어를 그대로 쓰지 않도록 기사에서 걸러내고, 내부에 위원회를 설치해 외국말에 대응하는 좋은 우리말을 찾아내야 한다. 한글학회와 국어연구원은 외국말에 상응하는 우리말을 찾거나 만들어 정기적으로 발표하면 되고,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공공기관은 공문서, 하부 조직, 직위 이름에 외국어 표기를 지양하면 된다. 지금까지 이런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부족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총, 균, 쇠’에서 한글이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격찬한 데 자부심을 가지는 것으로 그치지 말자. 한글날이 국경일임을 잊지 말자. 우리말과 우리글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세종대왕께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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