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명한 말 중에 ‘행동하는 양심’이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아무리 옳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훌륭하지만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가장 큰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도 플라톤은 말했다. DJ의 생애가 어떤 가시밭길이었는지를 잘 알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엔 묵직한 울림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중립금지법’이라는 게 있었다. 폴리스에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날 때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사람은 시민권을 박탈하도록 한 법이다.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솔론(기원전 638~558)이 만든 개혁법 중 하나다. 환난에 처한 공동체를 외면하고 개인의 안위만 꾀하거나 회색지대에서 눈치만 보는 사람은 자유시민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그의 철학이 담겼다.

미국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이후 반인종주의 시위가 미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애틀랜타에서도 흑인 남성이 경찰 총격으로 숨져 불에 기름이 부어졌다. 그런 시위대를 일부 급진 좌파의 폭거로 규정하고 연일 독설을 퍼붓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중에 ‘침묵하는 다수’라는 표현이 나온다. 며칠 전에도 “침묵하는 다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는 트윗을 날렸다. 트럼프는 선거 때부터 이 말을 자주 써먹었다. 보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지하는 ‘샤이 트럼프’가 많다는 논리였다. 시위 행렬은 그 과격함 때문에 대표성이 과잉표출되는 것일 뿐 비동조자가 대다수라는 아전인수식 주장을 이번에도 펴고 있다.

한때 나치에 부역했다가 반나치로 돌아선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1892~1984)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는 방관자를 묘사할 때 자주 거론된다. 나치가 동료들을 잡으러 왔을 때 침묵했더니 막상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내 편으로 남은 사람이 없더라는 내용이다. 불의에 눈감은 지식인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국민을 꼬집었다. 이 시를 통합진보당 해산 땐 제1야당이던 민주당이,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외칠땐 자유한국당이 인용했다. ‘침묵하는 다수’의 진의를 극단적으로 갈라진 양 정파가 서로 자기 편의대로 해석한 것이다. 자신의 진심이 오독되고 때로는 적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침묵하는 자들이 치러야할 진짜 대가일지 모른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