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친구가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부산이 아프리카 토호들이 다스리는 부족국가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부산에는 인접한 지자체가 많다. 김해 양산 창원 울산이 경계를 맞대고 있고 밀양 경주도 가깝다. 인구를 합치면 700만 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리적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직장 때문에 출퇴근을 하든, 관광 목적의 여행을 하든 심리적 거리감은 꽤 된다.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오가지만 그런 게 아니다. 정서적으로도 남이다. 특히 부산과 경남은 같은 뿌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사건건 대립했다. 부산신항 관할권을 놓고 그랬고 경마공원 조성 때도 그랬다. 광역버스 노선 하나도 제때 합의를 못했다. 손바닥만한 영역 안에서 각자 족장 노릇에 만족하며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니 아프리카 토호라는 비유는 결코 억지가 아니다.

지리적 의미의 경기권, 역사적 연원을 가진 기호권도 아닌 ‘수도권’이란 기괴한 공간이 대한민국의 모든 자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지는 오래 됐다. 이제 수도권의 범위는 서울 인천 경기를 벗어나 남으로는 충청, 동으로는 강원까지 넓어졌다. 서울 노인들이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하루 코스로 온양온천을 즐긴다거나, 춘천 막국수를 먹고 온다는 건 별스런 이야기도 아니다.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광역철도만 13개 노선이 있다. 기존 도시철도의 연장, 광역급행철도(GTX)의 신증설, 순환고속도로의 확충으로 교통망이 종으로 횡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정부는 이것도 부족하다며 새 교통계획을 짤 때마다 집중적으로 확대 보완한다. 그것도 대부분 국비로 말이다. 재원의 출처가 확실하니 구축 속도도 빠르다. 부전과 마산을 잇는 광역복선전철은 분명 국가사업이지만 공사비를 전액 지자체에서 부담하라는 정부의 비수도권 차별을 성토하기도 이제는 입이 아프다. 이게 같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동남권 신공항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인천공항에 버금가는 관문공항을 남부권에 새로 만들자는 발상이 노무현 정부에서 구체화될 때만 해도 무려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도록 제자리 걸음일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공항의 타당성 여부는 이미 많은 국내외 전문가의 검토를 거쳤다. 연구기관이 어디냐에 따라, 때로는 같은 기관이라도 시기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왔다. 신공항 필요성에 대한 정량적 판단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해진 공식에 수치만 넣으면 나오는 답은 뻔하다. 그냥 해주기 싫었던 게 아닐까. 진짜 필요한지 관심조차 없었던 게 아닐까. 이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신공항 문제의 걸림돌은 지역 내부에도 있었다. 공항의 입지를 놓고 PK와 TK가 갈라지고, PK 안에서도 부산과 경남이 싸웠다. PK든 TK든 그때 단체장은 모두 현재의 미래통합당, 당시의 한나라당 새누리당 사람들이다. 이들은 1990년 3당 통합 이후 영남에서 30년 가까이 토호 노릇을 하며 안주했다. 선거 때만 되면 신공항을 띄웠다가 선거가 끝나면 검증 결과 타당성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업을 백지화시키는 패턴을 밟아온 것도 그들이다. 그렇게 지역 주민을 희망 고문한 것도, 지역 내 갈등을 부추긴 것도, 실제로 서로 치고 받은 것도 모두 그들이다. 신공항이 필요하다면서 목소리 하나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곳에 정부가 공항을 짓고자 한들 지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부산시의회 울산시의회 경남도의회 뿐 아니라 전남도의회가 동남권 관문공항 건설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은 오랫만에 참신했다. 호남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게 부산시의회의 정치력 덕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초 신공항이 논의될 때로 돌아가 부산에 24시간 운영 가능하고, 소음 피해가 없고, 무엇보다 안전한, 그런 제대로 된 공항이 생기는 게 호남에도 이익이라는 상식적인 발상이 반가웠다.

김해신공항 검증이 어떻게 결론날지 아직 모른다. 발표 시기도 이달 말이라 했다가 연기됐고 8월 발표설도 나온다. 과거 여러 용역의 전철에서 보듯 이번 발표 연기도 김해공항을 확장해 쓰는 게 맞는지 검토가 안 끝나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은 정부의 결단에 달렸다. 그러나 성사 여부를 떠나 부울경이 협력하고 호남까지 손을 잡아주는 지금의 신공항 추진 방식은 분명 진일보한 접근이다. 만약 가덕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 공의 많은 부분은 지금까지의 추진 세력이 아니라 마지막에 깃발을 꽂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단체장들에게 돌아가는 게 옳을 것이다. 대권은 근처에도 못 가면서 소지역주의를 부채질해 영달을 누리거나, 고향을 노후 보장용 봉토쯤으로 여기는 토호나 추장들에게 돌아갈 찬사는 없을 것이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