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겨울 개봉한 영화 ‘1987’에 지금은 50대가 된 ‘86세대(60년대 출생한 80년대 학번)’가 들썩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가슴이 떨려서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세대가 다른 기자는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1987년은 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그에게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승리의 해로 기억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가 개봉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관람 행렬이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영화를 관람한 뒤 “6월 항쟁을 완성시켜준 것이 촛불 항쟁”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민주당의 지도급 인사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때는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을 찾았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곳으로 현직 대통령 방문은 처음이다.

6월 항쟁의 주역들은 여권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데 이견이 없다. 6월 항쟁의 성과는 그 해 제9차 헌법개정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87년 체제’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개정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가 주요 내용이다.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 대통령의 권력 분산 등에 초점을 맞췄다.

균형과 견제의 분위기는 국회에도 번졌다. 개헌 이후 구성된 1988년 13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 여야 배분의 관행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이자 원내교섭단체의 4당 체제가 형성됐고, 전반기 원 구성 때 16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여당이던 민주정의당과 야 3당이 7 대 9로 나눴다.

전반기 국회가 막바지에 이른 1990년 1월 22일 야합이라는 비판 속에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당했다. 190석이 넘는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초거대 여당의 탄생이다. 하지만 후반기에도 여야가 12 대 4로 상임위원장 자리를 나눴다.

상임위원장 배분 관행은 20대 국회까지 이어지면서 사실상 ‘국회 관습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국회의원의 자리 나눠 먹기라는 비판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균형과 견제, 타협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장치로 작용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32년 만에 이 관행을 무너뜨렸다. 21대 국회에서 176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18개의 상임위원장직 중 17개를 독식했다. 현재로서는 야당 몫 국회부의장과 협의해야 하는 정보위원장도 민주당 차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스스로 이룩한 성과를 허물어 버린 셈이다. 그동안의 관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민주적 당위성을 갖춘 제도를 엎어버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미래통합당과의 원 구성 협상 당시 모든 상임위원장의 독식 가능성을 내비치며 “과반을 만들어준 국민의 뜻”이라고 했다. 그런데 21대 총선 지역구 투표에서 정당별 득표 결과는 민주당이 49.9%, 통합당이 41.5%인 것으로 집계됐다. 불과 8.4%포인트 차이다. 253개 지역구에서 민주당 후보는 모두 1434만5425표를 득표했고, 통합당 후보는 1191만5277표를 얻었다. 표 차이는 243만 표다. 민주당의 ‘국민’이 지지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야는 13대 국회 이후 번갈아 정권을 차지하고, 17, 18대 국회에서 교대로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임위원장을 배분하는 관행은 지켰다. 숱한 희생으로 일궈낸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았겠나.

국민은 어느 세력에게도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릴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국회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국회를 제도화하면 ‘6월의 희생’이 너무나 아깝지 않나. 한 조사를 보면 민주당의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에 대해 ‘잘못했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21대 국회 원 구성은 여야가 다시 머리를 맞대는 것이 옳다. 현재 정치 상황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국회는 민의의 전당 아닌가.

박태우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