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태를 보며 2018년 부산시청 출입기자 때 시민단체인 부산참여연대와 공동으로 ‘6·13 지방선거, 시민의 정책 제언’이란 기획시리즈를 썼던 일이 떠올랐다.

지방권력이 교체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이 직접 여러 정책을 개발·검증하고, 이를 후보자에게 제안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후보자가 제시하는 공약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정책을 생산, 나아가 채택을 요구함으로써 지방권력의 중심이 선출된 자가 아닌 유권자에 있음을 보여주자는 게 기획의도였다. 당시 참여연대는 45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1년간 수많은 정책을 개발·검증했고, 이를 압축해 국제신문과 함께 후보자에 정책 제안에 나섰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당선, 23년 만에 지방권력이 교체되면서 상당수 제안이 민선 7기 부산시정에서 현실화됐다. 시민과의 실질적 ‘협치’를 주관하는 담당부서가 생겼고, 첨예한 갈등이 있는 사회현안을 시민이 직접 참여해 논의하는 정책숙려제가 BRT(중앙버스전용차로제) 확장 등 사례에 적용됐다. 퇴직 관료가 공공기관 임원을 꿰차는 ‘관피아’ 문제를 해소하고자 공공기관장 인사청문회가 처음으로 성사됐고, 처음으로 외부형 감사관제가 도입돼 좀 더 깐깐한 내부 견제의 틀이 마련됐다.

물론 이런 정책들이 제대로 착근했는지 는 더 따져봐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와 불만이 있고, 오 전 시장이 낙마하면서 동력이 약화한 건 사실이지만 시작이 중요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건 이제 남은 자의 몫이다. 정책 제안 중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 부시장 정원 문제로 사회불평등 해소와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부시장직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 정도였다.

2년 전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부산시가 채택한 이런 제안 대부분이 서울시 정책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 때문이다. 기획시리즈 시작 때 참여연대 측은 “정책 개발에 시민 참여가 활성화한 서울시의 사례를 주로 참고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관거버넌스를 의미하는 협치를 행정의 한가운데 놓고 사고한다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 정권에서도 민관협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시민은 들러리 서는 거수기, 구색 맞추기에 그친 것이 사실이었다.

민선 7기 출범 초기 시가 협치를 주제로 이강준 서울시 전 총괄지원협치관을 초청, 직원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청책(聽策)’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통 정책 수립은 관이 주도해 기본안을 만든 뒤 추후 공청회 등을 통해 시민 의견을 수렴, 수정·보완하는 톱다운 방식이 일반적 과정이라면 서울시는 부서별로 정책을 만들기 전 시민 의견을 먼저 듣는 청책 토론회를 열고, 전문가 공무원 등이 참여하는 숙의토론을 거친 뒤 계획을 수립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생산한다는 설명이었다. 순서만 살짝 바꿨는데도 정책의 중심은 관에서 민으로 완전히 바뀐다. 시민은 정책의 수혜자가 아닌 주도자가, 정치인이나 관료에 의한 변화가 아닌 내 삶을 스스로 바꾸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물론 여기엔 전제가 있다. 단순히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민이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므로 데이터를 최대한 공개한다는 것이다. 이에 서울시는 1만 원 이상 예산이 들어가는 정책 내역은 모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실제로 서울시와 부산시 홈페이지 비교만 해도 공개되는 데이터양은 큰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행정과 시민이 권한과 책임을 나눈다”는 게 이 전 협치관의 설명이었다.

협치를 행정의 가장 중심에 세운 박 전 시장의 시정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아니 7년 전에(2018년 기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준비했고, 실행했지?’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성추행 의혹에 대해 박 전 시장을 비호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전제로 쓰는 글이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다만 성 비위와는 별개로 행정의 패러다임을 대전환한 ‘소셜 디자이너’로서, 정책가이자 혁신을 실현한 행정가로서 그를 추모할 뿐이다.

이선정 사회1부장 sj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