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룡은 어린 아두를 갑옷 속에 품고 창을 ‘꼬나들더니’ 마침내 말을 달렸다. 조조의 병사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아기까지 딸린 단기필마의 장수에겐 살아남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죽어 나가는 건 조조 군사들 아닌가? 조자룡은 헌 창으로 풀 베듯 조조 진영을 휘젓는다. 높은 곳에서 지켜보던 조조가 이윽고 수하에게 묻는다. “저 장수가 누구냐?” 부하들이 답한다. “예. 상산 땅의 조자룡이라는 자입니다.” 보고를 들은 조조가 명언을 남긴다. “허! 그놈 참 온몸이 간덩어리로구나.”
‘간이 크다, 어떻다’가 아니다. 그걸로는 조자룡을 담을 수 없다. 그냥 ‘온몸이 간덩어리’다. 장비는 장판교를 지켰고, 관운장은 오관참육장(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적장을 베다)을 했지만, ‘삼국지’에 빠져 있던 어릴 적 내 주위에는 조자룡을 좋아하는 아이가 많았다. 우직하고 의리 있고 성실하며 간절히 이기고 싶어 하는데 온몸이 간덩어리이기까지 하니, 멋지지 않은가!
살면서 실제로 온몸이 간덩어리였던 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비록 TV로만 봤지만) 딱 한 사람 꼽겠다.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 부산 남자, 악바리, 탱크 박정태.
31게임 연속안타 신기록,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우승 당시 (하도 오래돼 상대 팀이 기억이 안 난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뒤 환호하던 2루수, 1999년 삼성과 붙은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전설의 ‘깡’과 캡틴 리더십, 미스터 올스타 두 번과 골든글러브 다섯 번의 영광, 지옥 같은 부상에서 끝내 자신을 되살려낸 투혼, 흔들 타법, 눈빛…. 사람들이 박정태를 자이언츠의 전설로 꼽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박정태 야구’가 불덩어리처럼 내 가슴에 찍혀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연도는 정확히 모르겠다. 1990년대 한일 슈퍼게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참 강했다. 우리 선수들은 긴장하고 주눅 든 듯했다. 아니면 한국 관중이 ‘우리 팀이 과연 수준 높은 일본 프로야구 선발팀을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주눅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해설가는 “저 일본 투수의 공은 웬만큼 배트 스피드가 빠르지 않으면 치기 힘들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배트 스피드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은 것 같다. 다음 타자는 박정태.
박정태는 ‘쌔리삤다’(때려버렸다)! 지금 기억으로는 우전안타였다. 아! 저 남자는 어떻게 저렇게 겁도 없는가? 저 공을 때려버리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쓸 것이다. ‘그는 온몸이 간덩이’. ‘영웅’을 가슴에 간직해서 좋은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좋은 추억을 품었다가 살면서 때때로 꺼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사실 지금까지 애써 떠올려본 이 한일 슈퍼게임의 기억이 틀렸거나, 왜곡됐을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을 엄청나게 검색해 봤다. 한일 슈퍼게임에서 치러진 여러 경기의 간략한 기록표는 찾을 수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경기였는지 알아내기는 어려웠고 그 장면을 담은 영상은 못 구했다. 방법은 한 가지, 박정태를 만나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 담당 기자가 아니면 힘든 일이고, 추억은 세월의 식성을 당해내지 못해 아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정태 한국클럽야구연맹 이사장이 지난 6월 30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국제신문으로 ‘출근’한다. 국제신문 유튜브 채널이 방송하는 ‘박정태의 롯데 야구 편파 중계-아! 넘어가나요’의 해설을 흔쾌히 맡아 박호걸 기자와 자이언츠 경기를 생중계한다(다만, 경기 화면은 방영되지 않는 ‘입중계’다). 그것도, 내가 일하는 편집국 바로 옆방인 스튜디오에서 한다. 첫 방송을 하루 앞둔 날, 그는 편집국으로 와서 기자들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물론, 나도 그와 악수했다. 어린 날의 영웅과 드디어 ‘대면’한 것이다.
그가 지역 사회 청소년과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더 밝고 씩씩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야구를 통한 봉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그 일만 해도 피곤할 법한데 매주 한 번 중계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면 이 사람,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탱크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사실 저는 모든 경기를 중계하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팬 여러분을 만나 실시간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그가 중계 도중 털어놓은 ‘부산 남자다운’ 속마음이다.
이 비대면의 시절에 마음속 스타를 대면하고 보니 우리가 대면을 그리워함을 느낀다. 비대면은 방법일지언정 목적은 아니며 우리 삶에서 적절한 대면은 필요했던 것도 알게 된다. 대면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이다. “그래서 그때 한일 슈퍼게임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다음엔 꼭 물어보고 싶다.
편집국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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