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뻐해야 할 날이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일본의 식민지로 되었는가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국민통합의 장이 되어야 할 날이다. 그런데 광복회 회장의 나라를 편가르는 연설로 국립현충원 파묘법 등 이전부터 존재하던 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가히 역사전쟁으로 비화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잘살아가기 위해 우리 역사를 읽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쓸 수 있고, 쓸 수 있는 만큼 역사를 만들고 창조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고결한 것만 나열하여 국가를 위대하게, 민족을 거룩하게 하는 미화 작업이 아니다. 수치스러운 사실도 알고 반성하여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광복회 회장의 연설에서 드러난 바, 현 정권 사람들은 우리 남한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신 친일파들의 나라라고 보는 편향된 인식을 하고 있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먼저 역사적 사실을 숙지해야 함은 기본이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했다고 친일파 거두로 몰아붙이지만, 정작 일본에선 강경한 반일 인사로 통한다. 거의 평생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에 바쳤고,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지켰다. 그의 초대 내각에 친일파 이름은 거의 안 보인다. 자료에 의하면 북한 정권 역시 남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친일파를 대거 기용했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
해방돼 통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남이나 북이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친일 기술 관료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북에서도 친일파는 노동당에 충성하며 출세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김일성 유일 체제에 반대하는 한 숙청의 대상이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남로당 계열이 그렇게 사라졌다. 현 정권 사람들 가운데는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 과정에서 옥고 등 고초를 겪으면서 형성된 역사관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정권 아래 가장 고초를 많이 당한 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일본에 납치돼 생사 고비도 넘었다. 1998년 일본 방문이 예정돼 있었는데 그 무렵 일본 농림부 장관이 술김에 “한국은 일본 식민통치에 감사해야 한다” 고 말해 한·일 관계에 위기를 가져왔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망언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도쿄 방문을 강행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함께 열어갈 비전을 제시했고, 이에 오부치 당시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뜻을 밝혔다. 성숙한 역사인식에 터 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략적인 통찰과 단호한 결단력 덕분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투옥돼 27년 동안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서 어떻게 변화됐느냐는 물음에 “성숙해져서 나왔다”고 답했다. 흑백갈등으로 내전 기미마저 보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만델라의 성숙함이 남아공의 위대한 통합을 이룬 기초가 됐다.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로 우리나라와 폴란드가 있다. 폴란드는 통일 독일의 중심이 된 프로이센과 러시아 등에 의해 18세기 후반 점령당해 123년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1차 대전 직후 간신히 나라를 되찾았지만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 맨 먼저 침략당했고, 2차 대전 때 사망한 폴란드인은 6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었다. 그렇지만 폴란드는 과거사나 외교·안보 이슈로 독일을 비판할 때 수위를 조절한다. 독일의 투자를 끌어당겨 부강해지고 있고, 독일과 공생하게 된 현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마신 피아트코프스키 세계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폴란드 경제를 분석한 ‘유럽의 성장률 챔피언’이란 책을 내고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발전 전략을 따라 하며 성공하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폴란드는 역사를 잊지 않되 현재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나라다.
코로나까지 창궐하고, 미중 갈등이 증폭되는 엄중한 현실이다. 우리에게도 성숙하고 현명한 역사인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어버린다. 세계를 보지 않는 사람의 세계관만큼 위험한 세계관은 없다. 역사인식도 마찬가지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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