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동남권은 한국 주력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조선, 자동차, 기계 산업이 전방 산업으로서 이끌고 철강, 석유화학이 후방 산업으로서 소재를 공급했다. 이 산업들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 수출 주도 대기업과 이들 기업에 부품재를 공급하는 하청계열화된 조밀한 생산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해왔다.

포항-울산-부산-창원-여수-광양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동남권 제조업 생산벨트는 여전히 한국 제조업의 중심지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1990년대, 2000년대와 2010년대의 동남권이 차지하는 위상이 전혀 달라져 왔음을 안다. 과거 동남권은 경제 성장의 중심지였지만, 현재는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로 전락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전망이 엇갈리는, 미래가 불투명한 지역이 됐다.

동남권 주력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은 자동화를 통해 이뤄졌다. 생산 자동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업에 유용했다. 로봇 도입은 기계에 체화된 기술을 통해 생산혁신을 이루고 노동자에 대한 숙련의존도를 낮춰 생산 과정에서 사용자 지배력을 강화했다. 자동화는 또한 임금상승 압력을 완화한다. 기계가 신규 고용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오르면 노동조합은 단협을 통해 임금 상승을 추구하는 분배투쟁에 집중했다. 대기업 제조 현장은 자동화, 생산성 향상, 임금인상 투쟁이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동남권 산업구조가 주요 대기업의 생산 네트워크로 구축되면서 중견기업, 중소기업의 시장 개척 노력은 부재했으며, 다양한 산업과의 융합 노력도 없었다. 대기업이 제시하는 사양에 맞춰 부품 공급만 하면 됐기에 제품 혁신을 위한 노력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협력기업은 공정혁신으로 단가 인하 노력만 하면 됐다. 기업 간 거래관계는 특정 산업 분야의 폐쇄된 네트워크에 갇혔다. 대기업만 잘 나가면 관련 중소기업도 성장했다. 2012년 이전까지 이 체제는 잘 작동했다. 중국 특수로 혁신 없이도 고도성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곧 위기에 직면한다. 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수요가 대폭 감소했고 중국 경제성장률은 10%대에서 6%대로 하락한다. 세계 선박 수요가 대폭 줄면서 조선업이 먼저 붕괴했다. 중국의 설비투자 감소는 기계 산업 수출을 큰 폭으로 낮췄고, 그나마 있던 투자조차 중국 기업에서 조달하면서 매출액 성장도 정체한다. 2015년 이후 자동차 판매량도 감소한다. 자동차, 조선, 기계의 매출성장률이 음을 기록하면서 철강산업 성장률도 음을 기록한다. 동남권 제조업 동반 위기다.

수도권 제조업은 동남권과 운명을 달리했다. 2000년대 이후 수도권 성장은 반도체, 정보통신, 네트워크 산업이 주도했다. 2010년대 이후 금융위기 속에서도 경제 디지털화에 힘입어 반도체 수요는 커졌고 통신, 게임, 검색엔진 등 ICT 산업은 꾸준히 성장했다. 제조 혁신 바람 속에서 기계의 디지털화·스마트화가 지속하면서 ICT는 자동차산업, 기계산업, 항공우주산업 등 제조업의 핵심적인 소재-부품 연관산업이 됐다. 동남권은 제조업 성장에서도 경제의 디지털화 측면에서도 수도권과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함을 보인다.

제품 혁신, 경제의 디지털화는 고급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를 공급하는 대학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제조업이든 지식서비스 산업이든 생산직 노동자 수요는 줄고 지식노동자 수요는 증가한다. 기업 투자는 인적 자원 충원이 쉬운 수도권에 집중된다. 수도권에서조차 대기업은 생산직 고용은 사내하청을 중심으로 늘리고 엔지니어, 재무 관련 사무직, 연구직만 직접 고용한다. 수도권은 동남권보다 생산직 대기업 강성 노조도 적다. 대규모 금속노조가 많은 동남권에서 신규 투자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진다.

대기업은 제조 및 물류 분야는 동남권에 남겨두고 연구개발, 디자인, 마케팅 등 고부가가치 경영 활동은 수도권 본사나 연구기관으로 이전하고 있다. 그 결과 동남권은 제조업 ‘생산기지’가 되면서 중국, 동남아와 입지 경쟁에 내몰리고 제조업 신규 투자에서는 수도권에 뒤처진다. 전통 제조업은 아시아 경쟁국에 내어주고 첨단 제조업은 수도권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혁신이 지체돼 온 결과다. 늦었지만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집합적인 고민과 대안을 만들 시점임을 자각하자.

경남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