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통령의 업무는 결혼식장과 장례식장 가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모두 지낸 해리 트루먼(1884~1972)의 말이다.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 시 승계 1순위이지만 대통령이 재임하는 한 존재감이 클 수 없다. 1인자를 제치고 너무 나서기도, 마냥 그림자일 수도 없어 역할은 애매하다. 어느 조직이나 ‘부(副)’라는 접두사가 붙은 직위가 그렇다. ‘준(準)’ ‘유사’ ‘아류’ 등의 단어도 같은 맥락에서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상황을 굳이 숫자로 표현한다면 ‘0.5’쯤 될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한때 모든 식당에서 밥을 0.5인분씩 판매하라는 행정조치를 내린 적이 있다. 쌀값이 치솟자 소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15년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의 전면 혁신을 천명한 이른바 ‘밀라노선언’을 통해 “삼성의 디자인은 아직 1.5류에 머물러 있다”면서 직원들을 채근했다. 일본과 미국의 기업이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1류는 턱없고, 2류라 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였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이민 가서 현지 문화에 더 익숙한 세대를 칭하는 ‘1.5세대’라는 표현에도 ‘0.5’는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다.

지금 수도권에는 코로나19 재확산을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고 있다. 실내 50인 이상, 실외 100인 이상의 집회나 모임이 금지되고 고위험 다중이용시설 운영이 중지되는 건 2단계와 같다. 여기에 카페나 식당처럼 실내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민간시설의 영업시간이 제한되는 등의 조치가 추가된 것이다. 거리두기 2.5단계는 대형 조선소를 중심으로 환자가 번지는 경남 거제에서도 적용 중이다.

정부가 지난 6월 만든 단계별 코로나 방역지침에는 원래 2.5단계가 없다.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가능한 느슨한 수준의 1단계, 대규모 모임을 금지하는 조금 타이트한 수준의 2단계, 봉쇄 수준의 최고 강도인 3단계가 전부다. 2단계에서는 국민이 큰 불편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지만 3단계에선 필수적인 사회·경제활동 외엔 전부 금지된다. 올해 초 신천지 사태 때에도 완전한 3단계까진 가지 않았다. 경제 전문가들은 3단계 방역이 본격 시행되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물경제 타격과 심리적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정부의 고민이 매뉴얼에도 없던 2.5단계로 나타난 것이다.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재난이 유례없는 방역단계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