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났다. 현재까지 사망자 188명에 실종 7명, 부상자 6500여 명으로 알려졌다.

화물선에 실린 채 6년이나 방치돼 있던 질산 암모늄 2750ｔ에서 폭발이 비롯됐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비료는 물론 화약 등 무기 제조에도 쓰이는 위험물질이 왜 갑자기 폭발했는지 누구도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 관리부실부터 테러 등 정치적 음모론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했지만, 퇴임 장관들은 서로 비난에 급급했다. 오죽했으면 국민이 현장을 방문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에게 “대신 통치해달라”고 매달렸을까. 닷새 뒤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베이루트 폭발은 미국에 주는 경고다’라는 글이 실렸다. 글쓴이는 NYT의 대표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 우리에게도 친숙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의 작가다.

글은 40여 년 전 베이루트에서 지인들과 가진 식사 대화로 시작된다. 그 며칠 전 중동 날씨답지 않게 몰아친 눈바람 원인을 놓고 갑론을박하다 “그러면 (레바논과 적대적인) 시리아가 한 짓이구먼”이란 말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을 씁쓰레 반추하면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치적 음모가 횡행하는 까닭으로 그는 레바논의 극단화된 정치구조를 꼽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 간 철저한 나눠먹기식 권력구조 탓에 “모든 것이 정치화”됐다는 것이다. 공직 임명부터 부정행위 조사, 예산책정까지 모든 게 정치적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당연히 책임감 결여, 부패, 상호불신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프리드먼은 왜 여기서 미국에 대한 경고를 떠올렸을까. 먼저 미국 정치가 민주·공화 양당 대결이 심화하면서 레바논의 종교적 당파싸움처럼 돼버렸다는 점을 꼽는다. 실제 선거판이 “지배하느냐, 아니면 죽느냐(rule or die)”식 대결이 됐다고 개탄한다. 아울러 미국 역시 레바논 마냥 ‘모든 것을 정치화’하는 현상을 또 다른 이유로 제시한다. 기후변화에서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 쓰기까지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해석해 양당이 극한으로 맞선다고 우려한다.

예컨대, 에너지 정책에서 공화당은 석유 가스 석탄 개발을, 민주당은 풍력 태양력 수력을 주장하며 충돌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대목을 읽다 순간 멈칫했다. 정확히 우리 모습이 오버랩된 탓이다. “이번 물난리 때 문재인 정부의 태양광이 산사태를 키웠다.” 통합당의 주장에 민주당은 발끈했다. “태양광이 원인이 된 건 1%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이 더 큰 문제였다.” 월성1호기 폐쇄를 둘러싼 공방도 닮은꼴이다.

여당 의원들은 나름의 소신으로 감사 중인 감사원장에게 대놓고 “사퇴하고 정치하라”고 압박한다. 반면 야당은 반색하며 이 참에 탈원전에 쐐기를 박겠다는 각오다. 이 와중에 월성1호기의 안전성 경제성은 실종된 지 오래다.

지나친 정치화로 문제 본질과 해결이 뒷전으로 밀린 채 사회적 갈등만 키우는 사례가 이뿐이랴. ‘K방역’ 성과가 무색하게, 방역도 정치에 오염돼버렸다. 코로나 재확산의 기폭제가 돼버린 8·15 집회를 놓고 ‘야당 책임론’과 ‘공포정치 기획 시나리오’가 격돌한다. ‘조국 백서’가 나오기 무섭게 ‘흑서’가 등장했다. “개혁에 대한 딴지”와 “특권과 위선에 대한 후안무치”의 대결투다. 나라를 결딴냈던 ‘조국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프리드먼은 “모든 것의 정치화는 민주주의의 끝장”이라고 단언한다. 진실보다 오직 각자 주장과 견해만, 사실보다는 날 선 의지들의 경쟁만 있기 때문이란다. 한 마디로, 레바논의 비극적 현실은 매사를 ‘공동선(common good)’보다 정치적 잣대와 정파적 충돌로 풀어내려다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대선을 앞두고 극단적 대결로 치닫는 미국을 보며 몸서리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이젠 의사 증원에서 법원판결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 셈법으로만 받아들여진다. 사생결단식 대립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협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

레바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 너무 과민한 것일까. “(정치 과잉의) 이런 트렌드를 바꾸는 게 시대과제다.” 프리드먼의 절규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부산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