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 9단이라는 말이 있다. 바둑에서 유래된 말인데, 대국 당사자보다는 옆에서 보는 사람이 상황을 더 냉철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업에 대해 훈수하는 사람은 경영학자, 투자나 증권은 애널리스트, 정치판은 정치학자, 미디어는 언론학자, 영화는 영화평론가로 불린다. 다들 전문가라고 주장한다. 2016년 3월 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훈수 9단들은 이렇게 해설했다. “이해가 가지 않네요. 알파고의 명백한 실수입니다. 앗, 근데 집을 세어보니 알파고가 앞서 있네요.”
전문가들은 대국 내내 이세돌이 유리하고, 알파고는 치명적인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고 해설했는데 정작 이긴 것은 알파고였다. 지금은?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다.
앨버트 잭이 쓴 ‘지금은 당연한 것들의 흑역사’에 따르면 IBM사의 회장은 전 세계의 컴퓨터 수요는 5대뿐이라고 전망했다. 벨이 전화기를 발명할 당시 당대 과학자들은 전화기는 ‘쓸데없는 장난감’이라고 비웃었다. 비틀즈와 소설 ‘해리포터’도 음반사와 출판사로부터 여러 차례 퇴짜를 맞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전문가들이 ‘전문성’이라고 굳게 믿는 올드한 ‘지식체계’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아브스만 교수는 식품의 유효기간처럼, 해당 분야의 지식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는 데 걸리는 ‘지식의 반감기’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저서 ‘지식의 반감기’에 따르면 원자핵물리학은 5.1년, 경제학은 9.4년, 심리학은 7.15년이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데이터가 많이 축적될수록 지식의 반감기는 더욱 짧아진다.
20세기는 표준화와 전문화 시대였다. 업무수행에 효율적인 지식은 형식지로 정리되어 학교·기업·조직에서 제공되었다. 이런 지식들은 지금은 인터넷 접속만 해도 얻을 수 있다. 형식지로 가능한 일들은 대부분 AI가 더 잘 한다.
어제의 지식으로 오늘의 트렌드를 읽고 내일을 예측해 준비할 수 있을까? 질을 꿰뚫는 인사이트(insight)는 보통 통찰력으로 번역된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장조사를 믿지도, 하지도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세상에 선보였을 때, 기자가 어떤 방식으로 시장조사를 했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 벨이 시장조사 같은 걸 하고 전화를 발명했습니까?”
대량생산을 통해 마이카 시대를 연 자동차 왕 헨리 포드도 그랬다. “만약 제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게 뭔지 물었더라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반면 1985년 코카콜라는 20만 명의 소비자 테스트를 통해 뉴코크를 출시하고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생산을 중단했다. 미래를 전망하는 안목을 ‘foresight’ 라고 한다. foresight는 통찰력(insight)이 있어야 가능하다. insight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insight는 ‘융합적 사고(cross-sight)’를 통해서 형성이 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평생 인문학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학들이 ‘기술경영학과’, ‘경영학·빅데이터응용학과’등 융합적 학과를 앞다투어 개설하는 것도 마찬가지 흐름이다. 융합적 사고를 통해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디자인 싱킹’이라고 하는 데, 세계 최고의 대학인 스탠포드대학은 이를 제도화해 ‘디스쿨’을 만들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다른 하나는 빅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이다. 대량생산체제에서 타겟은 대중(mass)이었다. 그 다음은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고객층을 세분화한 세그먼트 마케팅(segment marketing)이었다. 지금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특정한 개인 대상 마케팅이 가능해졌다. 학문에서도, 조직에서도, 기업에서도 의사결정이 빅데이터와 결합해 이루어져야 하는 이른바 ‘데시젼(data+desion)’의 세상이 된 것이다.
2025년까지 16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디지털 뉴딜’ 정책의 핵심도 데이터이다. 빅데이터가 있어야 인공지능이 쓸모가 있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이 가능하다. 한국은 아직도 판검사, 의사, 회계사 등 이른바 ‘사’자 돌림의 직업이 최고로 꼽힌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최고 직업 1위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이다. ‘전문지식’이라고 해도 이제는 유튜브 동영상이나 멜론의 음원파일처럼 필요하면 가져다 쓰는 클라우드 기반 지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글자를 읽지 못하면 문맹이었다. 그 다음에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이 문제였다. 지금은, 업무를 빅데이터와 결합하지 못하면, ‘AI Transformation’을 하지 못하면 ‘디지털 문맹’이 된다.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AI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600명의 주식 트레이더를 단 2명으로 줄이고, 데이터 이해능력 덕분에 살아남은 2명에게는 엄청난 연봉을 안긴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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