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경리가 쓴 불후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다 보니 마치 음악과도 같은 민중의 대화가 또렷한 매력 요인임을 느낀다.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 죽은 복동네의 한을 풀려고 야무네와 마당쇠댁네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마당쇠댁네는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다. 쌓이고 쌓인, 참고 견딘 분통의 둑이 터진 것 같다. 조신하고 말수 적었던 여자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엎어진 놈은 발로 걷어차고 그런 인심이 아니더믄 복동네가 죽었겄소?” “죽자 사자 길쌈을 해서 봄이믄 젤 많이 베를 냈제. 그래서 시기도 받았네라.” “야무어매” “와.” “생각해본께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놈의 늙은것한테 무신 봉변을 당해도 좋소. 나 나설라요. 사람이 죽었는데.” 마당쇠댁네는 성난 닭처럼 푸르룩 일어섰다.’ (박경리 ‘토지’ 제11권 14장 자살 중)

“야무어매” 하고 툭 던지니 “와” 하며 무심한 척 받고, “생각해본께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하고 주장하니 “내 말이 그 말이다”며 넙죽 받는다. 바야흐로 뭔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비록 내가 당한 일이 아니더라도, 맺히고 막히고 쌓이고 억울하고 잘못된 건 ‘풀어야’ 한다. 백성의 마음이고 민중의 의식이다. ‘토지’에는 이렇게 리듬감 넘치는 민중의 대화가 숱하게 나온다. 그런 실개천 물살 같은 몸짓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가는 흐름이 밑바탕이고 기둥이다. 미학 측면에서나 주제 전개 차원에서나 ‘토지’는 주인공이 민중이다.

우리에게는 ‘민중이 주인공’이라 할 만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또 있다.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1289년)다. ‘삼국유사’의 큰 가치를 보여주는 요소는 꽤 다양한데, 우선은 그중 ‘민중이 보고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역사’ ‘민중의 역사학’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많은 수수께끼와 궁금증이 스르르 풀린다. 예컨대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은 통일신라 신문왕 때 나타난, 불면 천하가 화평해지는 피리다. 많은 현대인은 “지금도 그런 피리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안타깝게 거기까지다.

실제의 역사에서 신문왕은 즉위 초 반란 시도 등으로 적잖은 곤란을 겪었다.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런데도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잘 따르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런 왕의 착각을 일깨워주려고 민중은 만파식적 이야기를 널리 퍼뜨렸다는 설명이다.(고전학자 정천구 박사의 책 ‘삼국유사, 바다를 만나다’ 참고)

이래 놓고 ‘만파식적’을 읽으면, 신문왕 앞에 나타난 용이 이렇게 설명하는 대목을 만난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소.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쳐진 뒤에야’ 소리가 나는데, 거룩한 왕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조짐이오. 왕이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오.” 왕과 신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 합쳐져야’ 나라가 음악처럼 잘 다스려진다는 대답이자 경고를 민중이 용의 입을 빌려 한 것이다. 민중을 무시하지 말라는 거다. 아퀴가 딱 맞는 느낌이다. 고려의 일연 스님은 이 통일신라 시절 얘기를 민중에게서 듣고 ‘삼국유사’에 썼다. (같은 책)

‘만파식적’ 속에 현대 한국의 촛불 시민이 이미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질·심성·정서·문화·예술 등의 ‘문화 DNA’라 할 만한 것이 만져진다. 활달하고 창의적인 사람들, 지혜를 쌓고 올바름을 고민했던 민중이 거기 있다. ‘토지’가 그린 민중의 삶과 생명력은 ‘삼국유사’가 담은 민중의 역사학과 그렇게 만난다.

실제로 작가 박경리는 놀랍도록 깊은 통찰을 담은 책 ‘일본산고’에서 ‘삼국유사’의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 를 인용해 한민족의 밑바탕 기질·정서·심성을 슬쩍 드러낸다. 추운 겨울 스님 정수가 천엄사 문밖에서 얼어 죽기 직전인 여자 거지와 아기를 보자 옷을 벗어 덮어주고 자신은 알몸으로 절까지 뛰어와 볏짚을 덮고 밤을 지낸 이야기다. 민중은 오랜 세월 겪고 쌓은 수많은 경험 가운데 이런 일화를 소중히 간직했고, 일연은 그 가치를 알아채고 받아 적었다.

21세기는 디지털·초연결·상상력·창의성·혁신·민주주의·공감력이 이끄는 시대다. 디지털이 0과 1로 이뤄진 것처럼 ‘도 아니면 모’로 곧장 점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신이 얽매인’ 사람은 못한다. 주인 노릇 할 줄 아는 사람이 한다. ‘삼국유사’와 ‘토지’의 공통점인 민중성 속에서 21세기를 헤쳐나갈 지도와 엔진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국제신문 인문연구소가 창간 73주년을 맞아, 시민을 위한 인문학 사업을 오래 펼쳐온 ㈜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와 함께, 정천구 박사가 쓰는 ‘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을 지난 1일부터 매주 연재하기 시작한 기획의도다.

편집국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