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돌 한글날을 맞는다. 일본의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서늘한 가을의 ‘언어 축제’라니 얼마나 멋진가. 이 지구 어디에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라며 한글날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날을 맞는 마음은 한편으로는 무겁다.

지난 광복절 때, 정부가 17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자 한 언론이 ‘15~17일까지 사흘 연휴’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적잖은 사람들이 ‘사흘’이 4일이지 왜 3일이냐며 ‘사흘’ 논쟁을 벌였다. 또 ‘하나도 없다’를 ‘1도 없다’로 쓰는 젊은 세대도 있다는데, 이 말은 어느 국회의원이 청문회 때 여러 번 쓰기도 했다. 올바른 국어교육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오늘의 우리말은 신음하고 있다. 세계화란 미명 아래 ‘햇빛마을’이 ‘선샤인 아파트’로 바뀐 지 오래고, ‘요리사’를 ‘셰프’, ‘명소’를 ‘핫 플레이스’라 하는가 하면 방송 출연자의 귀를 때리는 ‘와이프’ 소리에 정든 ‘아내’가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자동차 뒷유리창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면 될 것을 ‘Baby in car’라 하며, 어느 치과는 알파벳만으로 병원 이름을 표기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0월 2일, 선조 임금은 왜어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한 역사 속에, 광복된 지 75년인데도 (칼로) 몸을 찌른다는 ‘사시미(刺身, 생선회)’는 물론 ‘시아게(마무리)’ 같은 말은 각 분야에 남아 있고, 우리말과 섞인 ‘삐카번쩍’, ‘왔타리 갔타리’들을 무심히 쓴다. ‘기념(紀念)’을 ‘기념(記念)’으로 적고, ‘축전(祝典)’을 ‘축제(祝祭)’라 하는데, ‘紀念’과 ‘祝典’이 우리의 전통 한자어이므로 이 또한 유의해 써야 할 말들이다.

외국어식 표현을 본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를 ‘영어식의 즐거운 주말 되세요’라 하고, 법률 용어에서 보듯 ‘규정을 위반한’을 일본식의 ‘규정에 위반한’이라 한다.

근래에 ‘반팔 옷’이란 말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반바지’를 ‘반다리 옷’이라 하지 않듯이 신체적 결함을 연상케 하는 ‘반팔 옷’은 ‘반소매 옷’으로 고쳐야 한다. ‘불편을 드려’는 ‘끼쳐’가 옳고 ‘눈에 콩깍지’는 ‘콩꺼풀’이라야 한다.

어느 소설가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며 ‘쳐다본다’고 했다. 그러나 위를 향해 보는 것이 ‘쳐다보다’다. 가요 속의 ‘민들레 홀씨’는 ‘민들레 씨앗’이 옳고, ‘열무’는 ‘어린 무’ 이므로 시어로 쓴 ‘열무꽃’은 ‘장다리무꽃’이어야 한다.

언론 또한 무관심하다. ‘국회의원 수’를 ‘국회의원 숫자’라 하고, ‘외국산’을 ‘수입산’, ‘희소병’을 ‘희귀병’이라 하며, ‘분쟁의 소지’를 ‘분쟁의 가능성’이라 한다. 천안의 독립기념관 건립문에는 ‘후손에게’가 ‘후손에’로 되어 있고, 고성 당항포의 충무공 전적비에는 ‘빗발같이’가 ‘빛발같이’로 되어 있으나 마음 두는 이 없다.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인도네시아 부톤섬 찌아찌아족이 지난해 한글 도입 10주년을 맞았다. 세종학당은 76개국 213개소에서 7만 5000여 명에게 한국어를 보급하고 있다. 기쁜 일이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족 중국어 교과서에서 한글을 퇴출시킨다는 보도를 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어려움을 이기며 한글을 지켜가기를 응원한다.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가 한자 대신 한글을 쓰려고 했으나, 나라 잃은 조선의 글자라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때 중국의 공식 문자로 채택되었더라면 오늘날 한글의 세계적 위치는 어떠할까. 아쉬움 속에 내일을 그려 보는 마음 부푼다.

이번,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에서는 코로나19 용어인 ‘팬데믹’은 ‘(감염병) 세계적 유행’으로, ‘코호트 격리’는 ‘동일 집단 격리’, ‘드라이브 스루’는 ‘승차 검진’으로 쓸것 을 권고했다. 한자어 ‘비말(飛沫)’은 ‘침방울’로 했다.

어느 방송의 노래 경연 장면, “할아버지, 파이팅!”하며 응원하라는 어머니 말에도 “할아버지, 잘해!”라 하던 손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우리가 한글날에 새겨야 할 마음의 표어다.

前 부산한글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