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의 말 바꾸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꼭”이라고 하는 그 절절함에 표를 찍고 나서 헛공약이었다고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중 가장 오랫동안 소모적인 갈등을 조장하고 말 바꾸기를 일삼았던 공약은 가덕신공항 건설이다.

얼마 전 정세균 국무총리가 국회 대정부 질의 답변에서 “가덕신공항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통령선거 공약은 아니다. 유사한 말씀은 하셨다”고 선을 그었다가 거센 후폭풍에 휘말렸다. 김해신공항안(김해공항 확장)에 대한 최종 검증 결과 발표를 앞둔 상황에서 정 총리의 발언이 찬물을 끼얹은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거에 나온 후보들이 대부분 가덕신공항 지지 또는 조건부 찬성을 한 데다 지난 달 송영길 의원도 부산상공회의소의 ‘가덕신공항과 조선 산업 그리고 부산경제’라는 특강에서 가덕신공항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까지 힘을 실어주면서 부산 울산 경남(PK)에선 ‘가덕신공항 건설이 기정사실화된 것 아니냐’는 희망 섞인 기대가 커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6년 총선 때 “부산에서 민주당에 5석을 주면 가덕신공항을 만들겠다”고 했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동남권 관문공항 건설을 지지했기에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는 다르다고 믿었다.

가덕신공항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부산권 광역종합 개발계획’에 맞춰 가덕도 개발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덕도 종합개발계획은 신공항·신항만 건설에 맞춰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부산 발전이 항만과 공항을 묶어 물류산업의 경쟁력을 갖추는 데서 시작한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듯하다. 하지만 정부가 인천국제공항(영종도 신공항) 건설에 집중하면서 가덕신공항 추진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가덕신공항이 다시 대두된 건 2002년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던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로 16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바다에 뜨는 공항’ 건설을 검토해 부산시와 해양수산부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 수준까지 못되면 매립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적당한 위치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2006년부터 정부 차원의 가덕신공항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가덕신공항은 이때부터 대통령 선거의 단골 공약으로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는 가덕도를 밀양과 경쟁시켜 지역갈등을 유발하더니 “모두 부적합하다”며 동남권신공항을 백지화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가덕도 대신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 냈다. 이렇게 동남권 관문공항은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했다. 27년간 부산시민이 겪은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김해신공항은 안전성 여부를 떠나서라도 관문공항이 될 수 없다. 24시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남권 신공항은 단순히 활주로 하나를 더 놓자는 의미가 아니다. 해외여행을 편히 가자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일극화 현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24시간 항공화물 운송이 불가능하다면 글로벌 물류경쟁에 밀릴 수밖에 없다.

지난 10일 PK 단체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균형발전과 동남권 메가시티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단체장들은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 창출 ▷철도를 포함한 광역교통망을 연결해 인구 800만 명의 광역경제권역을 구축하자는 공동의 목표에 합의했다. 변성완 부산시장 대행은 “대도시 중심으로 광역권을 구축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메가시티가 PK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동남권 관문공항은 부산항 신항과 연계해 국제물류기지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24시간 운항이 가능한 가덕신공항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다. 이렇게 PK가 한 목소리로 지방분권·균형발전과 동남권 메가시티 건설에 한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나. 그만큼 각 지역의 상황이 어렵다는 의미로도,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1995년 시작된 지방자치제가 올해로 25년째다. 그동안 수도권과 지역 간의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인구·금융·문화·일자리가 집중된 수도권에 비수도권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에서도 권역별 통합 논의가 시작됐다. PK뿐 아니라 대구·경북과 광주·전남도 통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은 수레의 양바퀴와 같은 것이다. 그 미래 비전을 PK는 동남권 메가시티에 담았다. 메가시티로 가기 위한 구심점이 바로 가덕신공항 건설이다. 가덕신공항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