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녀석이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좋은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제로 문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곁들인 얘기 하나, “나의 고등학교 시절, 동생과 함께 사용하던 방에는 주택 고유의 다락이 있었고, 나는 넓은 방을 두고 그곳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좁은 곳에서 느끼는 본능적 안정감 때문이었으리라. 공부 열심히 안 하고 숨어서 기타만 친다고 난리도 났지만, 벤처스 악단의 ‘파이프라인’과 톨스토이의 ‘인생론’이 함께했던 그곳은 주초고사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고, 삶의 온갖 가능성을 꿈꾸던 나만의 장소였다. ‘그래, 너도 그런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고유한 느낌과 의미가 살아있는 공간’을 ‘장소’라 했다. 의미 없는 텅 빈 공간에 삶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 때 구체적인 장소가 된다. 거기에는 새학기 문방구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처럼 감흥과 가능성이 있다. 마음껏 장소를 향유할 수 없는 시대에 힐링과 양생(養生)의 장소를 가져볼 일이다.

고향 집에다 서재를 꾸몄다. 3평 남짓한 공간의 벽면과 천정을 신문지로 도배를 했다. 누렇게 바랜 흑백 신문지가 무질서하게 벽을 장식했던 어린시절을 소환하여 ‘아름답고 질긴 왕자표 고무신’을 신고 무지개를 좇아가는 소년이 되고 싶었다. 사무실에 있던 500여 권의 책을 옮겨오고 벼루, 물감, 통기타, 빔프로젝트와 오래된 전자오르간 등으로 방을 채웠다. 친구 3명을 위한 ‘월요기타교실’은 백미(白眉)다. 자신의 사용가치에 투자하면 신선한 변화와 재미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과 공감할 수 있으니 이게 어딘가! 압권은 2018년 6월 19일자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입장권을 넣은 가로 14㎝, 세로 8㎝의 폼나는 액자다. 미술관 6층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휘감기는 구름을 향한 사이프러스 나무의 그리움과 전율이 매일 새롭다.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지겹지 않고 온갖 상상을 자아낼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탄생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나만의 장소냐고? 하지만 그것은 금전의 문제가 아니다.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로 인한 것이 아니듯, 화려한 인테리어와 유명 가구로 가득한 넓은 공간이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베란다면 어떤가! 행운목과 알로카시아, 관음죽이면 열대의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습도조절과 공기정화까지 해주니 꿩 먹고 알 먹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연녹색 간이 탁자 마주하고 빨간 의자에 앉으면 비엔나 커피 향과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판타지아’는 한통속이 되어 마음을 간질인다. 그것으로 자신의 창문 너머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내 삶은 더욱 충만해질 것이다.

우리 동네 장산 폭포 옆 경사길을 막 올라서면 길에서 3ｍ 정도 떨어진 곳에 내가 찜한 전용 벤치가 있다. 그곳에 앉아 낙차 20여ｍ 정도의 백발 같은 물줄기를 관조하면서 한가한 외로움에 잠기곤 한다. 외로워야 창조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철 지난 낙엽의 계절, 오늘은 벤치에서 조지 위스턴의 피아노 연주곡 ‘워킹 인 더 에어(walking in the air)’를 틀어놓고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을 조용히 읊조린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나도 낙엽 하나 내 곁에 내리기를 기대 해본다. 하지만 간간이 떨어지는 상수리잎은 무정하게 폭포 쪽으로 날아갈 뿐 감감무소식이다. 안 되겠다 싶어 낙엽 2장을 주워 곁에 두었다. 별로 고마운 마음이 일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의 춤을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낙엽과 소통하는 1㎝의 새로운 영감이 자랄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시 10편 정도라도 외워 낙엽과의 대화 내용이 아니라 말을 거는 방식을 바꿔봐야겠다고 생각을 다잡는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장소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독자들의 장소가 궁금해진다.

교육인·전 부산영재교육 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