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감상한 영화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작품은 ‘폭풍의 언덕’이다. 중학교 시절 서면로터리에 있던 북성극장에서 보았던 흑백영화다. 영국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을 만큼 명연기의 소유자 로렌스 올리비에(1907~1989)가 주연한 영화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아그리파 석고상처럼 굵직한 면과 선의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모습으로 195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 연극·영화계의 이단자였다.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1818~1848)작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란 명제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폭풍이 심하게 불어대는 한밤에 언덕 위 외딴집 풍경을 보여주던 촬영카메라의 앵글이 문득 가옥의 실내로 이동하면 올리비에가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장면으로 옮겨진다. 암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실내에 감돌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음을 예시한다.

원작소설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소설을 재구성한 드라마에 의거하므로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폭풍의 언덕’만큼 원작을 각색하여 관객으로부터 절찬을 받은 영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가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데리고 온 고아였다. 사춘기가 되면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연인 관계로 발전하나 그녀는 결국 부유층인 에드거와 결혼한다. 절망한 히스클리프는 미국으로 떠나 부자가 돼 하워스에 돌아온 뒤 잘 생긴 외모를 이용해 계획적으로 에드거의 여동생 이자벨라를 유혹해 결혼한다. 그런 뒤 옛 애인 캐서린에게 접근, 노골적으로 사랑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캐서린과 에드거를 괴롭힌다. 결국 캐서린은 딸을 낳은 후 사망하고 이자벨라도 남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선 집을 탈출한다. 마침내 언쇼가와 에드거 가문은 히스클리프의 계획과 소원대로 철저히 파산당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은 영국 중부지방의 요크셔 시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60㎞ 떨어져있는 하워스라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다. 이곳은 야트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집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동네 한가운데 큰 교회당이 에밀리 아버지인 브론테 목사의 교회이다. 아마 이 소설이 쓰여질 당시에는 200호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이었을 것이다. 교회건물 출입구를 정면으로 바라다보고 서면 오른쪽으로 샛길이 보이는데 그 길을 따라 교회 뒤쪽으로 80ｍ쯤 걸어가면 브론테 가족이 살았던 목사관에 도착한다.

거기엔 그들 가족이 사용했던 물건과 의상, 서재와 식당이 옛 모습 그대로 전시돼 브론테 목사와 에밀리, 그녀의 언니 ‘제인에어’의 저자 샬럿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후기인상파화가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게 그려진 우산 쓴 여인이 착용한 것과 같은 모자와 의상이 진열된 전시실에 아직 그들의 체온과 체취가 향기로 남아있어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을 환영하는 듯했다.

필자가 연구차 케임브리지대학에 갔을 때 볼일을 일찍 마치고보니 며칠간의 여유가 생겼다. 마침 런던에서 타고 온 렌터카도 있고 해서 겨울에 꼭 가보고 싶었던 ‘폭풍의 언덕’을 향해 하워스에 도착한 날은 2018년 2월 10일이었다. 이곳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임에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그 작은 농촌마을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항도 부산은 관광지로서의 조건이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반도의 대표적 해양 도시로 바다를 타고 들어오는 외세를 항상 정면으로 받던 곳이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굴욕과 슬픔이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관광적인 요소를 발굴해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면 관광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로부터 발달된 도자기문화와 왜관을 중심으로 테마를 재구성하면 해수욕철에만 밀려드는 관광객을 사계절 확보할 수 있다. 오늘날 관광여행지는 역사·문화적인 면에서 슬프고도 애달픈 테마로 흥미를 유발하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산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많은 유·무형문화재의 보고이다. 그중 부산 근교의 허구 많은 도자유적지와 용두산 공원 왜관터를 학술연구를 통해 개발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단 어떻게 자료를 수집해 창조적으로 재구성해 흥미롭게 제시하는가가 성공의 핵심이다. 부산은 ‘폭풍의 언덕’이 있는 하워스에 비하면 수백 배의 극적인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이런 내용들이 옛 도요지에 묻혀있는 사발 파편처럼 아직 땅 속에 묻혀 기나긴 겨울잠만 자고 있다.

권상인 경성대 공예과 교수·㈔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