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어느 자리에서 이런 의견을 들었다. “국가·중앙 차원의 정치는 보수·진보가 국민을 위해 겨루는 이념 정치가 중심이 되더라도, 지자체 차원의 지역 정치는 시민을 위해 당면한 문제를 풀어주는 문제 해결의 정치가 중심이 돼야 한다.” 그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중심 이동이 이뤄지면, 지역에서 대립은 줄고 협력은 늘지 않을까? 이것이 근사한 이상인지 실현 가능한 과업인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 의견은 그 뒤로 좀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달 8일 취임한 박형준 부산시장의 한 달은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도시인 부산은 예술·문화 영역에도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다. 복지와 함께 문화는 도시 행정에서 비중이 점점 더 커져야 하며, 커질 수밖에 없다. 시민 행복, 삶의 만족, 다양성 존중, 창의성 고양의 밑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은 때로 문화와 함께, 때로 문화와 별개로 움직이면서 지역문화 저변을 넓고 깊게 하는 핵심 요소다.

박형준 시장에게 지금 주어진 임기는 1년 남짓하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서 첫째 일은 예술·문화 현안을 점검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양과 질, 장기와 단기, 저변과 첨단, 공격과 수비, 대중성과 특수성 등 다양한 좌표에 현안을 올려놓고 분류하면 어느 정도 형편은 파악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이 각각 제 일을 하다가도 필요할 때 융합해 훨씬 큰 효과를 내는 모델도 늘면 좋겠다.

큰 틀에서 보자면, ‘문화불모지 부산’이란 주장을 실로 경계해야 한다. 부산이 특정 장르 예술의 불모지일 수는 있다. 예컨대 발레는 불모지에 가까워졌다. 추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작품을 올리는 공간도 현격히 줄었다. 그러나 한 도시가 ‘문화’ 불모지일 수는 없다. 문화에는 삶의 표현 양식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을 귀하게 살 수 있게 뒷받침하는 정서·시설·행동·투자 등의 수준이라는 뜻도 동시에 있기는 하다.

다시 말해, 부산에서 공연예술이 잘 안 풀린다면 ‘공연예술 불모지’가 아니라 ‘부산에는 공연예술을 크게 즐기지 않는 문화가 있다’고 하는 게 삶의 양식을 뜻하는 ‘문화’의 낱말 뜻에 비춰 더 알맞다. 이를 ‘대신, 야구를 더 좋아하고 즐기는 문화가 있다’로 받을 수도 있다. 문화불모지 표현은 열심히 일하는 이 분야 사람에게 ‘그럼 내 존재는 뭔가’ 하는 열패감만 주고, 있는 예술·문화 자산과 가치도 못 보게 한다. ‘불모(不毛)’는 완전에 가까운 부정 표현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부산 예술 현장은 2000~2010년 즈음 일종의 전성기를 한 번 찍은 것 같다. 그 뒤 활력이 줄곧 빠지며 한동안 사라졌던 ‘문화불모지’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한 예술·문화 기획자가 “내 기획이 이번에 실패한 건 내 잘못이 아니라 부산이 문화불모지이기 때문”이라고 숨을 핑계를 주거나 자기 이익을 위한 조촐한 기획안을 들고 “이 한 방으로 부산을 문화불모지에서 초원으로 바꾸겠다”고 큰소리치는 이에게 이용될 우려가 크다. 새로 출발한 부산시정이 주의할 대상도 이런 이들이다. 문화불모지 표현, 폐기하고 쓰지 말자.

부산시가 더 구체적인 지향과 판단을 제시할 필요도 있다. 외지든 부산 내에서든 주요 예술·문화 기관장을 위촉할 때 ‘부산에 현재 필요한 것은 이렇고, 그 목표에 비춰 장단점은 이러하며, 이런 지원은 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해줄 수 있겠는가’ 하고 묻고 알아보는 절차를 조금 더 강화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저희(부산시)는 자세히 모릅니다. 명망 있는 전문가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면 물심양면 돕겠습니다’하는 식으로 위촉하는 방식은 한계에 왔다. 막연히 접근하지 말고, 부산시가 문화·예술 현실을 더 냉정히 파악해야 한다.

이런 흐름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신임 기관장 위촉-부산시, 변화 혁신 주문 - 기관장 의욕 발휘 - 쌓였던 여러 문제 노출 - 안팎 반발 - 충돌 - 보도 - (이 과정 반복) - 타협 또는 파탄-원점 회귀(또는 제한된 성과나 후퇴). 이런 무한 루프의 덫에는 다시 안 걸려야 할 것 아닌가.

문화정책에서는 사람·아이디어가 모이게 하고, 과정을 중시하고, 공동 테이블 위에서 논의되게 하고, 자율적이고, 정책으로 연결하는 흐름이 중요할 것이다. 서울·수도권은 뭐가 그리 일이 잘 안 풀리고 일손이 모자란지 지역에서 노력해 사람을 기르면 쏙쏙 빼간다. 그러니 예술·문화 정책을 펴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곰곰 생각하면, 본질만 잘 파악하면 문화·예술 정책은 예산 대비 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는 분야다. 대상·종류도 다양하다. 복지 영역 또한 문화예술과 연결을 강화해 시민 삶 만족도를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분야에도 해결을 기다리는 중요한 문제가 많다.

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