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LA올림픽의 95㎏급 남자 유도 8강전은 한일전이었다. 한국의 하형주와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가 붙었다. 세계 랭킹 1위였던 미하라는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하형주가 상대를 번쩍 들었다가 매트에 내리꽂으며 한판승을 거둔 것이다. 유도에선 볼 수 없던 들배지기 기술이었다. 이런 하형주의 유도 스타일을 일본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 선수들이 승부에 집착해 잔 기술 위주의 경기를 펴는 사이 사라져버린 큰 기술을 하형주가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가 큰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건 진주 대아중학교 시절 씨름으로 기본기를 닦은 덕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엔 씨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도시가 곳곳에 있다. 고장을 대표하는 장사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김학용을 낳은 경북 경산, 이준희의 경북 예천, 이봉걸의 경북 안동, 홍현욱의 강원 삼척 등이 모두 그런 곳이다. 경남 마산(지금의 창원)과 진주는 씨름의 성지 혹은 메카라 불렸다. 김성률과 이만기가 잇는 마산계, 차경만과 최욱진을 배출한 진주계는 한국 현대 씨름의 계보 그 자체다. 강호동은 진주 출신이지만 마산에서 중·고교를 다니며 씨름을 배웠다.

국내에 프로씨름이 생겨 제1회 천하장사대회가 열렸을 때 초대 천하장사에 등극한 사람은 무명에 가깝던 21살의 대학생 이만기였다. 다른 선수에 비해 키도 몸집도 작았지만 힘이 아닌 기술로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제압했다. 이때부터 씨름은 20여년간 최고 인기종목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큰 덩치를 앞세운 체격 위주로 씨름의 패턴이 바뀌면서 특유의 역동성과 반전을 잃게 되고 팬들도 떠나갔다. “스모를 닮아간다”는 비판까지 들었던 씨름판에 다시 관중이 모인 건 최근 2, 3년 전부터다. 우람하나 둔탁한 몸 대신 균형 잡힌 ‘몸짱’ 선수들이 기술씨름을 구사하면서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팬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창원시립박물관에서는 지난 주부터 씨름 100년사를 되돌아보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록사진과 유물, 트로피가 모여있다. 창원시는 씨름 성지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지난해 전국 최초로 씨름진흥조례를 만드는가 하면 최근엔 씨름진흥협의회까지 설립했다. 씨름 연구와 발전을 도모하는 민관 싱크탱크다. 씨름은 고구려벽화와 김홍도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민족 고유의 스포츠다. 창원시의 이런 노력이 이제 막 인기를 되찾아가는 씨름의 부흥에 이바지하기를 응원한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