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못 갚는 서민이 많은 건 신용등급이 낮아서가 아니라 이자율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1976년 실험을 했다.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받은 돈을 소액으로 나눠 서민에게 담보 없이 저리로 대출해주는 금융실험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으면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고, 기존 신용등급 체제가 옳으면 손해를 보게 될 터였다. 결과는 상환율 99%의 대성공이었다. 그는 1983년 그라민은행을 설립해 600만 명의 서민에게 무담보 소액대출(마이크로크레디트)을 해줬다. 그 덕분에 대출을 받은 이의 58%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그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믿음이 인간사회의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입증한 사례였다.

도쿄 패럴림픽 시각장애인 여자 육상 200ｍ 경기가 열린 지난 2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믿음의 위대한 승리를 다시금 확인했다. 이날 예선 4조로 출전한 서아프리카 카보베르데 출신의 케우라니두레이어 페레이라 세메도(32)는 33초04로 조 4위에 그쳐 준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가이드 러너인 마누엘 안토니오 바스다베이가(30)가 무릎을 꿇고 그에게 반지를 건네며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과 끈으로 손을 연결해 함께 달리며 경기를 돕는 비장애인이다. 질주의 동력은 가이드 러너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바스다베이가는 11년 간 그림자처럼 세메도 곁에 붙어다니며 훈련과 경기를 도왔다. 세메도는 바스다베이가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믿음을 바탕으로 동반 주자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가이드 러너는 동계 패럴림픽에도 있다. 동계 패럴림픽의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 스키 선수의 경기를 돕는다. 동계 스키경기의 가이드 러너는 형광조끼를 입고 시각장애인 선수보다 앞서 스키를 타며 인도하는 반면, 하계 육상경기의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50㎝ 이내 거리에서 뒤처져 달리며 주로를 안내한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 참가한 한 국내 가이드 러너는 “둘이서 함께 스키를 타면 경쟁의 중압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스키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했다. 믿음의 가치를 웅변하는 대목이다.

40년의 공백을 깨고 새 앨범을 발표한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 팝 그룹 ‘아바’의 신곡 제목도 ‘나 아직 당신을 믿어요(I still have faith in you)’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굵디 굵은 금이 간 코로나 시대, 믿음의 가치를 일깨우는 가슴 설레는 사건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