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못한 전화에 ‘외숙모’가 찍혀있다. 어른들의 전화는 가슴 한 편을 서늘하게 만든다. 급히 전화를 걸었더니 통화중이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반가운 전라도 사투리가 들린다.

“증님아, 나 외숙모다잉.” 아는데 꼭 자기를 알리는 일부터 하는 친척 어른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린다. 큰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내게 ‘자신을 알아보겠나?’는 의미로 “자네, 나가 누구여?”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니.

숙모는 엄마의 병세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추석이 다가오니 오래 못 본 친지들이 떠올랐고 그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리느라 연결이 지연된 것이다. 우리는 오래 묵혀둔 소식을 꺼내 주고받았고 엄마 대면 면회가 가능해지면 영상통화를 꼭 걸겠노라, 다짐까지 하며 통화를 끝낸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오자 어느 해 가을, 외갓집에서 보냈던 날이 떠오른다.

추석은 대목이라 엄마는 명절을 비껴난 주말에만 친정에 갈 수 있었다. 다섯 번이나 차를 갈아타며 간 집에 아무도 없었다. 감나무 밭에 일하러 간 외조부모를 찾으러 나섰다.

높은 하늘, 황금들판, 고추잠자리 등의 교과서 지문에 나오는, 받아쓰기 단어가 한 자리에 모였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논두렁에는 쌀알 같이 작은 들꽃이 가득했다. 꽃 보느라 멈춰 선 나 때문에 동생은 한쪽 발이 논에 빠져 흙투성이가 됐고 엄마는 화를 냈다.

외갓집 안방에 누우면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창호지에 스민 달빛과 유리박스에 들어있는 신랑신부인형과 그나마 도시적이라 마음의 위안이 된 ‘도란스’ 불빛.

집에 가던 날, 곡식과 과일을 담으면서 “가이내야, 이놈 묵고 쑥 커라잉, 가실(가을) 지나고 날 추워지면 또 줄랑께 꼭 와라잉” 하던 외할머니와 숙모의 목소리도 새삼 떠오르고. 재래식 화장실은 내 소설의 중요한 공간으로 쓰였다. 햇빛 달빛 물빛 아궁이불빛…. 깜깜한 상태를 무서워하는 내게 그곳은 모두에게 공평한 자연의 빛을 배우기 좋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주소를 쳤다.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섬망을 겪던 엄마가 ‘성기동’집에 가겠다고 고집 부리던 그곳. ‘로드뷰’ 기능을 통해 본 외갓집은 거의 그대로였다. 해태인지 사자인지가 손잡이에 새겨진 초록 대문까지도. 유년의 그리움은 친정집이 있던 부산의 연지동으로 옮겨갔다. 2014년의 로드뷰에 아직 친정집이 있다. 환한 햇살을 받는 동네의 오목한 자리에.

그런데 2019년 2월 이후의 사진에 그 동네는 어둡다. 거리를 조금만 비켜나면 대낮인데 그 자리만 까맣다. 왜 그런가, 살펴보니 친정 가게가 있던 자리를 비롯해 대로를 따라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서 뒤편 주택가에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세상에, 남향의 그 집들은 언제 햇볕을 쬘 수 있을까.

옛 하야리아 부대가 부산시민공원으로 바뀐 후에 그 지역은 ‘숲세권’에 맞춘 높다란 아파트가 잔뜩 들어섰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파트가 거대 울타리처럼 시민공원을 둘러싼 모양일 테다. 자본의 독점욕은 바다 숲 하늘 등 자연에도 손을 뻗는다.

연제도서관에 상주작가로 출근하면 전포동 재개발 지역을 지난다.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는 거리감 원근감을 무시한 형태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현재 공사 중인 곳은 동의중학교가 가까이 있다. 그곳의 3학년 학생이 ‘태양이 사라진다면’이란 제목으로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했단다.

“운동장 바로 앞 고층 건물 공사 탓에 일조권·조망권·학습권이 침해당하고 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한다. 주인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관심이 필요하다.”(뭐라노-서당매, 이노성 디지털국장, 국제신문 지난달 2일 자 기사 인용)

내가 배웠던 자연의 빛은 공평했는데 지금 유년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참혹하다.

가을(秋)은 햇볕(火)에 고개 숙인 벼(禾)를 거두는 때라고 했다. 고개 숙여 공부하는 아이들의 정수리에 환한 햇빛이 쏟아져야 할 텐데. 고개를 들어 올려 봐도 콘크리트 빌딩만 있다면 가을은 어디서 배우고 느낄 수 있을까. 추석이 떠오르게 한 유년의 빛은 어른의 빚이라는 고민거리를 남겼다. 어쩌면 좋을까.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