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많은 스포츠 경기가 취소, 축소되었던 와중에 장소의 제한이 없는 바둑은 국내 및 국제 기전들이 온라인 방식으로 활발히 열리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신공지능’이라 불리는 일인자 신진서 9단을 중심으로 한국 기사들이 중국의 두터운 벽을 넘어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 아마추어 초보자 수준인 필자도 해설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시간이 되는대로 관람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바둑을 잊고 살던 필자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 2016년에 열린 이세돌과 알파고와의 5번 기 이후부터다. 바둑에서만큼은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확신으로 대다수가 이세돌의 압승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고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AI의 수준은 일취월장하여 이제는 모든 프로기사가 AI를 통해 바둑을 공부하고 있으며 바둑을 중계할 때 선수의 착점마다 AI가 보여주는 흑백 간 승률 그래프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실제로 AI의 실력은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세밀한 수읽기로부터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여겼던 전체적인 형세 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거의 완벽한 듯하다. 이제 프로 선수들의 확실한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AI의 덕택으로 선수들의 기량은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사실 바둑은 단 한 수로도 승부가 갈리는 매우 치열한 게임이다. 특히 프로 선수들에게 승리는 매우 절실하기 때문에 AI에 훈련을 의존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흑백의 돌이 넓은 반상 위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펼쳐지는 한판의 바둑을 인생의 여정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이제 AI가 이 여정의 안내자이자 지배자가 된 듯하다. 과거에 선수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었으며 이를 ‘기풍’이라고 불렀다. 동일한 규칙으로 승리를 향하는 게임에서 다양한 기풍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했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발 빠른 행마로 ‘제비’라고 불린 조훈현 9단이나 끝까지 참고 또 참는 기풍으로 ‘돌부처’라 불린 이창호 9단 등이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표적 기풍일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얽힌 어떤 분야든 다양성은 그 영역이 성장하고 진화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본 토양이다. 반면 획일화된 사고방식은 구성원들을 수직으로 줄 세움으로써 문화를 경직되게 하고 새로운 ‘변이’가 생겨나올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선수들이 자신들의 기풍을 깊이 연구하여 경쟁을 통해 서로 성장해갈 때 바둑은 진정 인간의 게임으로 의미를 가질 것이며 생각지도 못했던 기풍들이 등장하여 바둑의 ‘맛’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장구한 진화의 역사에서도 더 복잡하고 정교한 종의 출현의 기본 전제는 변이, 즉 다양함이다. 수십억 년 동안 단세포 형태로 존재해 온 생명이 변화한 지구 환경에 적응한 변이들에 의해 현재와 같은 수많은 고등 생명체로 진화해 온 과정은 실로 장엄하기 그지없다. 뿐만 아니라 자연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긴 여정을 거쳐 온 과학의 역사도 결코 승리의 탄탄대로를 걸어온 게 아니다. 다양한 생각들이 부딪히기를 피하지 않았고 그 부딪힘으로 인해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21세기도 이미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 AI는 우리의 기초적인 삶의 영역을 넘어 인간만의 특별한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다. 물론 어떤 영역은 인간들의 탐욕과 부패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나머지 AI로 교체하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제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AI에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될 것이다. AI가 현재 바둑의 규칙을 변형해가며 그 변화의 속도를 도저히 학습으로 따라올 수 없는 인간들은 제쳐두고 바둑을 그들만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릴지 어찌 알겠는가?

바둑은 그나마 게임에 그치지만 우리 삶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존재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지순협대안대학 학장·온배움터 교수·‘시민의 물리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