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는 1927년 조국 러시아(당시 소련)를 등졌다. 59년 후인 1986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곡 중 압권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꿈)’. 80대 노대가는 긴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이며 건반을 어루만지듯 두드렸다. 너무 맑고 고와서 애틋한 소리. “고생하셨어요. 꿈을 잃지 않으니, 이런 재회의 날이 있군요.” 천상의 선율로 혹독한 스탈린 독재를 견뎌낸 동포들을 위로하는 듯했다. 빨려들 듯 연주에 몰입하는 젊은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눈을 감은 노신사…. 당시 연주회 영상에는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일군 ‘희망’의 싹이 푸릇푸릇하다. 절망을 다독이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슈만이 트로이메라이를 포함한 13곡의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정경’을 작곡한 건 1838년이다.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설계하던 때였다. 슈만은 “나는 당신에게 어린애처럼 보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라는 클라라의 편지 글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기교를 최대한 억제하고 어린이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선율만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 중에서 울림이 가장 큰 게 일곱 번째 곡인 트로이메라이다. 깊은 영혼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염원이다. 곡이 아름다운 건 그 간절한 바람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호로비츠가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그 곡을 고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2년째 지속된 코로나19 사태로 피멍 든 연말, 지친 시민에게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를 들려주고 싶다. 위중증 환자와 사망자는 연일 최다 기록을 경신하고, 또 다시 강제된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언제 좁혀질지 기약이 없는 암담한 시절이다. 스탈린 독재 치하의 모스크바 시민과 이를 지켜본 호로비츠의 심정 역시 그랬다.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 교수로부터 결혼 승락을 받지 못한 슈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가꾸며 절망의 시간을 버텨냈다.

선현들 또한 다르지 않다. 키케로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했다. 괴테는 “희망은 불행한 인간의 제2의 영혼”이라고 했다. 희망은 없어선 안 될 삶의 필수 영양소라는 얘기다. 물론 ‘헛된 희망’도 있다. 선거철이면 풀어놓았다가 흐지부지하는 정치권의 ‘희망 고문’이 대표적이다. 그럴수록 희망에 대한 안목을 더욱 단단히 벼려야 한다. 내년 대선은 희망을 담금질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희망이 절망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